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다시 넘어섰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호르무즈해협과 홍해로 번지면서 중동산 원유 공급 불안이 커진 영향이다. 통상 유가 급등은 원유를 수입해 가공하는 정유사에 부담이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원유보다 휘발유·경유·항공유 등 석유제품 공급이 더 빠듯해지면서 제품 가격이 더 가파르게 뛰고 있어서다.
특히 국내 정유사의 주력 수출품인 경유는 미국과 아시아 시장에서 원유와의 가격 차이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다. 러시아와 중동의 정제시설 가동 차질에 미국의 대이란 제재로 중국 정유업체들의 원유 조달 부담까지 커지면서 글로벌 정유시장이 이례적인 '고마진 구간'에 들어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유 품귀에 마진 급등
외신 등에 따르면 지난 9일(현지시각) 브렌트유는 장중 배럴당 101.55달러까지 올랐고 101.21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브렌트유가 100달러를 넘어선 것은 지난 7월 이후 처음이다.
중동 확전으로 원유 공급 불안도 커지고 있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예멘 후티 반군이 드론과 탄도미사일로 사우디 남부와 아람코 에너지 시설을 공격한 데 이어 호르무즈해협에서도 미국과 이란의 보복 공격이 계속되고 있다. 전쟁 이전 하루 약 1800만배럴이었던 중동 산유국의 원유 수출량은 현재 1100만배럴 수준까지 줄어든 것으로 추산된다.
정유업계가 더 주목하는 것은 석유제품 수급이다. 러시아와 중동의 정제시설이 잇따라 차질을 빚으면서 휘발유·경유 등 제품 가격이 원유보다 더 가파르게 오르고 있어서다. 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을 뺀 정제마진도 강세를 보이고 있다.
전쟁 등 여파로 러시아와 중동에서는 각각 하루 약 200만배럴씩, 총 400만배럴가량의 석유제품 공급이 줄어든 것으로 추산된다.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러시아 정유시설 가동이 차질을 빚는 가운데 중동산 제품 공급까지 감소했다. 미국 정유시설 가동률도 이미 역사적 최고 수준인 98%까지 올라 추가 생산 여력은 크지 않다.
특히 경유 공급이 빠듯하다. 뉴욕상업거래소(NYMEX) 경유 선물은 지난 9일 갤런당 4.8010달러로 2022년 4월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미국 경유 정제마진은 최근 장중 배럴당 108.02달러까지 치솟았고, 아시아 저유황 경유(황 함유량 10ppm 이하) 정제마진도 약 102달러로 처음 세 자릿수로 올라섰다.
경유는 중장비와 산업용 연료 등으로 폭넓게 쓰여 수요가 탄탄하다. 여기에 주요 공급처인 러시아와 중동의 정제시설 차질까지 겹쳤다. 재고도 여유가 없다. 미국 중간유분 재고는 전년 동기보다 10.1%, 싱가포르는 19.6% 적은 상황이다.
국내 정유사에는 실적 개선 요인이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정유 4사의 석유제품 수출량은 4억8535만배럴로 이 가운데 경유가 2억237만배럴로 42%를 차지했다. 공급 부족이 가장 두드러진 경유가 국내 정유사의 최대 수출품인 만큼 수출 채산성 개선에 유리한 환경이다.
다만 수혜를 온전히 누리기는 어렵다. 정부가 국내 수급 안정을 위해 휘발유·경유·등유 등의 수출을 제한하고 있어 해외 가격이 오르더라도 정유사들이 수출 물량을 자유롭게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고마진 특수 언제까지?
증권가는 높은 정제마진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신한투자증권은 올해 하반기 복합정제마진을 배럴당 평균 30달러로 전망했다. 전쟁 이전인 지난해 4분기 평균 10달러의 3배 수준이다.
실적 기대치도 높아지고 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의 올해 3분기 연결 영업이익 컨센서스는 1조7066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97.6% 증가할 전망이다. 에쓰오일도 1조641억원으로 364.2%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원유 도입 비용도 일부 낮아졌다. 사우디 아람코는 아시아에 공급하는 아랍라이트 원유의 공식판매가격(OSP)을 지난 7월 두바이·오만유 대비 배럴당 9.5달러 할증에서 8월 1.5달러 할인으로 낮췄다. 제품 가격은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반면 원료 부담은 일부 완화된 셈이다.
중국 정유업계의 상황도 변수다. 미국의 대이란 제재 강화로 값싼 이란산 원유 조달이 어려워진 중국 정유사들은 러시아 ESPO와 이라크 바스라 원유 등으로 구매처를 돌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러시아산 원유에는 벤치마크 대비 배럴당 8~10달러의 프리미엄까지 붙었다.
원가 부담이 커진 중국 민간 정유사들이 가동률을 낮추면 중국산 휘발유와 경유 공급도 줄어들 수 있다. 이 경우 아시아 석유제품 수급은 한층 빠듯해지고 국내 정유사의 정제마진에도 추가적인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전쟁이 장기화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국내 정유업계는 중동 외 지역으로 도입선을 다변화했고 정부 발표 기준 10월까지는 예년의 약 90% 수준에 해당하는 원유 물량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호르무즈해협에 이어 홍해까지 수송 차질이 확대되면 이후 원유 도입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유가 변동성이 커지는 것도 부담이다. 원유 매입과 제품 판매 사이에 시차가 있어 유가가 급등한 뒤 빠르게 떨어질 경우 재고평가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원료 구입에 필요한 운전자금 부담도 커진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 원유를 어느 정도 확보해 놓았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 원유 도입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며 "호르무즈에 이어 홍해까지 막히고 석유·정제시설 피해도 누적되고 있어 공급 여건은 전쟁 초기보다 더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유가 변동 폭이 큰 것 자체도 정유사에는 부담"이라며 "결국 전쟁이 얼마나 빨리 진정되고 정제시설이 얼마나 빠르게 복구되느냐가 관건"이라고 부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