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케미칼이 울산공장에 770억원을 들여 짓기로 했던 폐플라스틱 화학적 재활용 설비 투자를 전격 중단한다. 석유화학업계의 장기 불황과 대산 산업단지 설비 통합 등 고강도 사업재편이 가시화되면서 당장 현금을 벌어들이기 어려운 미래 신사업 지출을 선제 차단해 유동성을 방어하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완공 설비도 '개점휴업'
18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롯데케미칼은 전날(17일) 이사회를 열고 울산공장 내 폐페트(PET) 화학적 재활용 시설 투자를 중단하기로 했다고 공시했다. 2021년 5월 투자 계획을 처음 내놓은 지 약 5년 만이다.
당초 롯데케미칼은 울산2공장에 연산 4만5000톤 규모의 해중합 공장을 신설하고 여기서 나온 단량체(BHET)를 투입해 연간 11만톤의 고순도 재생 페트를 생산하는 화학적 재활용(C-rPET) 체계 구축을 추진했다. 폐플라스틱을 분자 단위로 분해해 불순물을 없애는 해중합 시설을 국내 최초로 세워 자원순환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2022년 C-rPET 생산설비를 짓고 해중합 공정 설계를 마친 뒤 더는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석유화학 시황 악화로 2023년 말 완공 목표를 2027년 말로 한 차례 미뤘으나 결국 해중합 공장 착공을 최종 포기했다. 총 투자금액은 기존 770억원에서 기집행액인 약 166억원으로 확정됐으며 잔여금 약 604억원의 지출 계획은 취소했다.
이미 지어진 C-rPET 생산설비는 철거하지 않고 당분간 유휴 상태로 유지할 계획이다. 롯데케미칼 관계자는 "향후 재활용 시장 생태계가 열려 다시 사업을 검토하게 되면 언제든 즉시 가동할 수 있도록 여지를 열어뒀다"고 말했다. 시장 환경이 회복될 때까지 설비 가동을 멈추고 지출을 끊어내되 사업의 완전한 폐기보다는 유예에 방점을 찍었다는 설명이다.
中 공세에…화학업계 덮친 감량 바람
롯데케미칼이 친환경 투자를 멈춰 세운 배경에는 국내 석유화학 산업을 뒤흔든 중국발 공급 과잉과 친환경 시장의 구조적 한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과거 원유를 정제해 만든 나프타를 분해해 에틸렌 등 기초 화학원료를 생산하고 이를 최대 소비국인 중국에 내다 팔아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중국이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설비를 대규모로 증설하며 기초소재 자급률을 100% 안팎까지 끌어올리자 시장 판도가 뒤흔들렸다. 국내 기업들의 수출길이 막힌 데다 값싼 중국산 물량이 전 세계로 쏟아져 나오면서 제품을 만들수록 손실이 쌓이는 조 단위 적자 구조가 수년째 이어졌다. 본업에서 벌어들인 현금으로 미래 신사업을 키워내는 선순환 고리가 완전히 끊어진 셈이다.
여기에 미래 사업으로 낙점했던 친환경 플라스틱 시장마저 기대만큼 열리지 않았다. 폐플라스틱을 화학적으로 분해해 새로 합성하는 화학적 재활용 플라스틱은 복잡한 정제 공정과 설비 투자 탓에 기존 일반 플라스틱보다 생산 원가가 훨씬 비싸다. 친환경 제품이 자리 잡으려면 식음료나 가전 등 전방 산업의 완성품 기업들이 높은 가격을 감수하고 이를 적극 사줘야 하지만 경기 침체가 길어지며 수요 확산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결국 본업의 적자가 누적되는 상황에서 언제 수익이 날지 모르는 신사업에 수백억원을 추가 투입하는 것은 부담이 컸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신사업 속도 조절은 석유화학업계 전반의 공통된 흐름이다. 국내 석유화학사들은 불황 극복을 위해 친환경 사업 자산을 매각하거나 투자를 축소하며 재무 건전성 확보에 나서고 있다. SK이노베이션 계열의 SK지오센트릭은 지난 5월 폐플라스틱 재활용 자회사 원폴 지분 100%를 사모펀드에 68억원에 매각했다. 2022년 약 113억원에 인수한 지 4년 만에 사실상 절반 수준의 손실을 감수하고 정리한 것. SK지오센트릭은 미국 퓨어사이클 테크놀로지와 캐나다 루프 인더스트리, 국내 수퍼빈 등 재활용 관련 투자 지분도 잇따라 처분하며 비핵심 자산 정리에 속도를 내고 있다.
친환경 사업에서 군살을 뺀 롯데케미칼의 실탄은 당장 생존이 걸린 사업구조 개편에 집중되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같은 날 이사회에서 HD현대케미칼과의 대산 산단 통합법인인 'H&L어드밴스드'에 6000억원을 출자하는 안건을 함께 의결했다.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기초유분 수익성이 무너진 상황에서 당장 현금을 벌어들이지 못하는 친환경 라인 신설을 멈추고 산단 통폐합 등 주력 사업 재편과 차입금 상환에 가용 자금을 우선 투입하겠다는 전략이다.
시장에서는 향후 1년간 롯데케미칼을 비롯한 국내 석유화학업계의 사업재편이 가시화되면서 본격적인 체질 개선 국면에 들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조현렬 삼성증권 연구원은 "롯데케미칼은 최근 대산공장을 물적분할해 HD현대케미칼과 합병한 통합법인을 출범했고 여수공장 역시 여천NCC와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며 "통합 법인들을 지분법 인식 대상으로 두더라도 범용 화학에 대한 노출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선 중장기으로 긍정적 신호"라고 진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