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혁명의 최대 복병은 열(Heat)이다. 초고성능 AI 칩이 뿜어내는 발열과 천문학적인 전력 소비가 데이터센터의 물리적 한계로 떠오르면서 열을 제어하는 냉각 인프라가 AI 생태계의 핵심 승부처로 부상했다. 공랭식의 한계를 넘어 액체와 특수 오일로 서버를 식히는 차세대 열관리 기술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비즈워치는 조 단위 데이터센터 냉각 공조(HVAC) 시장에 뛰어든 전자업계와 윤활기유 기술력을 이식해 액침냉각이라는 신시장을 개척하는 정유업계의 영토 확장 전략을 상·하편에 걸쳐 짚어봤다. [편집자]
국내 정유업계의 사업 무대가 주유소와 석유화학 공장을 벗어나 차세대 데이터센터 수조로 확장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AI 사용량이 급증하면서 서버를 전기가 통하지 않는 특수 절연유에 직접 담가 식히는 액침냉각이 정유사들의 미래 수익을 책임질 핵심 격전지로 떠오른 모습이다.
에어컨 끄고 수조에 담근다
2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의 윤활유 자회사 SK엔무브를 비롯해 GS칼텍스, 에쓰오일(S-OIL), HD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 4사는 AI 데이터센터의 고발열을 제어하는 액침냉각 사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데이터센터 냉각이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로 떠오른 것은 서버 랙의 전력 소모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고 있어서다. 과거 일반 서버 랙의 전력 소모는 5~10킬로와트(kW) 수준이었지만 엔비디아 블랙웰 등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기반 랙은 120~130kW, 차세대 시스템은 200kW 이상이다. 찬바람으로 열을 식히는 기존 공랭식으로 감당 가능한 한계치(랙당 30~40kW)를 서너 배 이상 웃돈다.
액침냉각은 서버 전체를 전기가 통하지 않는 특수 절연유에 담가 열을 식히는 방식이다. 에어컨 바람보다 찬물에 몸을 담글 때 열이 훨씬 빠르게 식듯 공기보다 열전도율이 월등히 높은 액체를 순환시켜 부품의 열을 즉각 흡수한다. 팬을 돌리지 않아 소음과 먼지가 없고 누전 위험도 차단된다. 냉각용 전력 소모도 획기적으로 줄여 통상 1.4~1.6 수준이던 데이터센터 전력사용효율지수(PUE)를 이론상 이상치인 1.10 안팎까지 떨어뜨릴 수 있는 기술로 꼽힌다.
달아오른 서버를 기름에 담그면 화재가 나지 않을까 싶지만 냉각유의 인화점은 통상 250도 안팎에 달해 발열로 인한 발화 가능성이 극히 낮다. 오히려 공기 유입을 차단해 불이 번지는 것도 막아준다. 물과 달리 전기가 전혀 흐르지 않는 절연체라는 점도 핵심이다. 국내 정유사들이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다투는 고급 윤활기유가 바로 이 특수 절연유의 주원료다 보니 가장 자신 있는 안마당인 셈이다.
국내 정유사 중 가장 먼저 액침냉각 시장에 뛰어든 SK엔무브는 LG전자와의 동맹을 차세대 열관리 전반으로 넓히며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23일 양사는 공조용 냉매와 냉동기유는 물론 데이터센터 액침냉각 기술을 공동 개발하고 사업화에 협력하는 업무협약을 맺었다.
앞서 미국 액침냉각 전문기업 GRC와 함께 LG전자 평택 칠러사업장에서 통합 솔루션을 실증해 온 양사는 이번 협약으로 연구개발과 양산 단계까지 협력 범위를 넓힌 것. 2022년 GRC 지분 투자를 단행했던 SK엔무브는 SK텔레콤 데이터센터 적용 실적을 확보한 데 이어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과 손잡고 에너지저장장치(ESS)용 제품 상용화까지 마친 상태다.
GS칼텍스는 서버 전체를 담그는 액침냉각유 '킥스 이머전 플루이드 S'뿐 아니라 발열 부품만 집중적으로 식히는 직접액체냉각유체 '킥스 DLC 플루이드 PG25' 등을 개발해 시장 공략에 나섰다.
회사는 2024년 삼성SDS 데이터센터에 이어 지난해 LG유플러스 평촌2센터에 자체 액침냉각유를 공급하며 현장 검증을 마쳤으며 대전 기술연구소에서는 글로벌 서버 제조사 슈퍼마이크로컴퓨터의 AI 서버를 들여와 냉각 성능을 평가하고 있다. 나아가 계열사인 GS건설, 전문기업 SDT와 손잡고 자사 냉각유를 탑재한 조립식 액침 데이터센터 설계 기술 개발로 협력 범위를 넓히는 흐름이다.
에쓰오일은 기업 간 연합을 통해 공공과 민간 데이터센터 진입을 꾀하고 있다. 국산 서버 제조사 KTNF, 액침냉각 장비기업 글로벌스탠다드테크놀로지(GST)와 실증 협약을 맺고 서버(KTNF)-냉각유(에쓰오일)-장비(GST)로 이어지는 국내 액침 밸류체인을 구축했다. 향후 신세계 I&C 데이터센터 적용을 목표로 고발열 제어용 '에쓰오일 e-쿨링 솔루션'의 성능을 검증하는 단계다. 지난해에는 범한유니솔루션을 통해 ESS용 액침냉각유 공급을 개시하며 이미 상용화 실적을 확보한 점도 차별화 요소로 꼽힌다.
HD현대오일뱅크는 글로벌 규격 선점과 대형 클라우드 기업과의 협력에 방점을 찍었다. 이 회사의 액침냉각 전용 윤활유 '엑스티어 E-쿨링 플루이드'는 업계 표준으로 통하는 미국 GRC의 일렉트로세이프(Electrosafe) 프로그램 인증을 획득했다. 이를 기반으로 네이버클라우드와 계약을 맺고 2025년부터 2028년까지 4년간 액침냉각 서버 테스트용 냉각액을 공급하고 있다. 아울러 서울대학교 AI 연구실과 한국세라믹기술원 등 공공·학계 연구 인프라로 실증 전선을 넓히며 호환성 검증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천수답 체질 바꿀 '새 무기'
정유 4사가 데이터센터 냉각유 시장에 사활을 거는 배경에는 전통 정유 사업의 구조적 취약성이 자리 잡고 있다. 올해 상반기 국내 정유 4사의 합산 영업이익은 14조7906억원으로, 1조원이 넘는 적자를 봤던 1년 전 대비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SK이노베이션(5조6495억원)과 GS칼텍스(4조1874억원)를 필두로 HD현대오일뱅크(2조7576억원), 에쓰오일(2조1961억원) 등 4사 모두 2조원 이상의 호실적을 거뒀다.
그러나 장부상 호실적의 상당 부분은 올초부터 전개된 중동 지정학적 위기에 따른 유가 급등으로 발생한 재고 관련 이익이다. 실제 SK이노베이션의 정유 자회사 SK에너지는 상반기 영업이익의 69%인 1조3400억원을, 에쓰오일은 35%인 7600억원을 재고 평가 이익으로 채웠다.
향후 유가가 하락세로 돌아서면 배럴당 10달러 떨어질 때마다 업계 추산 각 사별로 2000억원 안팎의 재고 관련 손실(역래깅)이 불가피하다. 여기에 전기차 보급 확대로 핵심 캐시카우이던 내연기관용 엔진오일 수요 둔화가 예견되면서 실적 변동성을 방어할 고부가가치 수요처 발굴이 절실한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빅테크의 AI 인프라 확장은 정유업계에 새로운 활로로 여겨진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포춘 비즈니스 인사이트에 따르면 세계 액침냉각유 시장 규모는 올해 4억4799만 달러(한화 약 6000억원)에서 2034년이면 24억9888만 달러(약 3조3000억원)까지 팽창할 전망이다. 연평균 성장률만 24%에 달한다.
조형희 연세대 기계공학과 명예특임교수는 "마이크로소프트(MS)와 인텔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액침냉각 도입을 목표로 자체 R&D 투자와 실증 테스트를 진행 중"이라며 "액침냉각 기술의 적용 범위는 AI 데이터센터에 그치지 않고 전기차 배터리와 ESS처럼 고발열 전동화 인프라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비전도성 냉각유에 직접 담그는 액침 방식은 열을 균일하게 제어하면서 화재 위험을 구조적으로 낮출 수 있다"며 "이러한 확장성이 산업 간 경계를 허물고 있는 만큼 앞으로 얼마나 다양한 기업들이 견고한 협업 체계를 선제적으로 구축하느냐가 액침냉각 시장의 주도권을 가르게 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