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보험산업이 유례 없는 위기상황에 처해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올해 보험업계 수장들은 위기극복을 위해 일제히 '소비자 중심의 패러다임 전환'을 강조하고 있다.
규모의 성장, 수익확대 등 기존 성장중심 전략으로는 더이상 생존이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단초는 고객과의 연결지점인 상품에서부터 비롯돼야 하지만 그동안 쌓인 관행과 인식체계의 틀을 깨야 하는 만큼 답을 찾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이미 이에 대한 답을 찾으며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곳이 있다. KB생명이 그 주인공이다.
고객이 이해하는, 고객의 가치기준에 맞춘 상품을 개발해야
KB생명은 국내 굴지의 은행계 보험사지만 생명보험사 가운데서는 자산수준 17위에 머물러 있는 중소형 보험사다. 수수료 중심의 머니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보험상품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엔 쉽지 않은 위치다.
때문에 KB생명이 생존과 성장을 위해 택한 전략은 '저들과 똑같이'가 아닌 '다름'이었다. 이 다름은 '고객'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지금까지 보험사 시각에서 상품을 만들었다면 KB생명은 '고객이 원하는, 고객이 이해 가능한, 명확한 상품'을 만드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하고 있다.
패러다임 전환은 2018년 7월 조직된 CPC전략본부로부터 시작됐다. 고객, 상품, 채널을 아우르는 KB생명 CPC전략본부는 상품기획, 신규비즈니스, 고객 데이터 마케팅을 비롯해 판매채널의 수수료 선정과 교육, 지원 등에 이르는 모든 업무를 포괄하는 부서다.
CPC전략본부가 설립된 때부터 이를 총괄하고 있는 이정호 상무를 만나 보험산업 패러다임 전환의 선두에 선 이야기를 들어봤다.
KB생명은 그동안 이렇다 할 히트상품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CPC전략본부 설립 이후 2018년 말에 내놓은 첫 상품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원금보장에 확정금리 3.5%라는 파격적 조건을 내건 온라인전용 '착한저축보험'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입소문이 나면서 한때 접속장애를 일으키기도 했다.
저금리 장기화로 역마진 이슈를 겪고 있는 보험환경 하에서 공시이율이 아닌 '확정금리'를 적용하고 수수료를 거의 배제한 점은 주목받았지만, 1년 만기 온라인상품인 만큼 신규고객 유치를 위한 마케팅용 반짝 상품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이후 출시된 상품들 역시 '타사와 차별된, 하지만 회사의 수익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 상품'이 줄을 이었다. 회사를 알리기 위한 마케팅용이 아닌 '실제 그러한 상품'들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출시된 KB생명의 '7년의 약속 평생보험'은 수익률이 아닌 '해약환급금'에 초점을 맞췄다. 종신보험은 판매수수료가 높기 때문에 통상 납입기간이 10년 이상 지나야 해약환급금이 납입한 보험료의 100% 수준에 도달한다. 반면 이 상품은 기존 종신보험 특성을 깨고 7년이 지나는 시점에 해지환급금 100%를 보장한다. 저금리 상황에서 공시이율이 아닌 '확정금리'를 적용한 점도 눈에 띈다.
보험에 대한 불신은 '해약자'로부터 발생한다
생명보험사 대표상품인 종신보험은 지금까지 '추가납입제도 등을 이용할 경우 저금리 하에서도 장기적으로는 은행 예·적금 보다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식으로 판매돼 왔다.
동일한 보장에 납입기간동안 해약환급금을 없앤 대신 상대적으로 보험료가 낮은 '무해지 종신보험'이 나오면서부터는 소위 '수익률'을 앞세운 판매관행은 더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정호 CPC전략본부 상무는 "7년의 약속은 '고객의 시각'에서 상품을 만들자는 단순하지만 가장 중요한 발상에서 시작됐다"며 "보험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거의 대부분 해약자로부터 기인하는데 해약시점에 따른 해약환급금이 명확치 않으니 이 부분을 명쾌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생각과 시도는 올해 선보인 '약속종신보험'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약속종신보험은 경과기관별로 납입보험료에 비례해 해지환급금이 정해지는 종신보험으로 업계에서 최초로 선보인 상품이다. 납입기간이 5년일 경우 최초 1년간은 해지환급금이 발생하지 않지만 1년이 지나는 시점부터 환급금이 20%, 2년차 이후엔 40% 3년차 이후 60% 순으로 납입완료시점에 100%를 맞췄다.
여타의 종신보험이 가입시점 예시됐던 것과 해지시 받는 환급금이 달라 고객들의 불만이 쏟아졌던 것과 달리 이 상품은 고객 스스로 언제 얼마의 해지환급금이 발생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또한 이 상품을 비롯해 일부 저축성보험을 제외한 모든 보장성보험에 확정금리를 적용했다.
이런 상품 컨셉트는 이미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있었다. 이 상무는 보험계리사로 상품개발을 비롯해 경영혁신, 영업기획, 지점장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거쳤고 10여년 전 지점장 시절 고객들을 상대하면서 구체화했다. 고객의 기대가치에 맞는 상품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상품을 실현해 내지 못했다.
그는 "기존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프라이싱(보험료 산출) 방식을 고민해야 했다"며 "실현까지 10년이 걸렸다"고 했다.
또 "처음 가입단계에서 설명했던 그대로 환급금과 보험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고객의 불만을 줄이는 동시에 영업현장에서도 간단히 설명하고 고객에게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다"며 "소비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고객이 상품을 이해할 수 있고 고객의 가치기준에 맞는 상품을 내놓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수수료 경쟁서 벗어난 '룰브레이커'가 돼야 성장할 수 있다
이 상무는 보험사가 그동안 수수료 경쟁에 매몰된 것은 보험상품 자체의 상품성이 낮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와 달리 보험사의 리스크가 커지면서 보험사는 상품별로 리스크를 헷지하려고 했고 갱신형, 공시이율이 적용되는 등 상품이 복잡해졌다"며 "상품이 복잡해 판매하기 어려워진 만큼 더 많은 수수료를 주게 됐고 상품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가입한 소비자들은 중간에 보험을 해지하게 되고 가입시 들었던 것보다 낮은 환급금을 받게 되면서 보험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커져갔다"고 진단했다.
이어 "보험영업이 고객 니즈가 아닌 판매자 니즈에 맞춘 머니게임 경쟁으로 혼탁해졌다면 이를 바꾸는 것은 근본적으로 보험사가 상품 수수료를 낮추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서는 기존의 경쟁체제를 깨고 나오는 '룰 브레이커(rule breaker)'가 돼야 한다는 얘기다.
KB생명 상품들이 기존 상품들과 비교해 환급금을 높이고 명확히 했다는 것은 그만큼 수수료를 낮췄다는 것이다.
KB생명은 은행지점을 통한 방카슈랑스가 주력채널이지만 두번째로 큰 채널이 GA(독립 법인대리점)다. GA는 여러 보험사의 상품을 판매하는 만큼 가장 수수료에 민감한 조직이다. 수수료가 높은 상품 중심으로 판매가 이뤄지기 때문에 시장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수수료 경쟁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것.
그러나 이정호 상무는 "KB생명 상품은 수수료가 낮기 때문에 높은 상품에 비해 영업현장에서 판매유인이 낮을 수 있다"며 "하지만 수수료를 많이 붙여 팔게 되면 결국 이전 상품들과 다르지 않고 이는 고객이 원하는 상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고객의 입장에서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 수수료를 낮추되, 고객이 이해하기 쉬운 상품을 만들고자 했다"며 "고객이 이해하기 쉬우면 그만큼 판매하기도 쉽기 때문에 이를 이해한 설계사들이라면 우리의 상품을 판매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상품의 초점을 판매유인을 높이는 것이 아닌 '고객의 이해'에 둔 것이다.
이는 작지만 분명한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정호 상무는 '고객의 기대가치'에 집중한 것이 결국 옳았다고 말했다. 이 상무는 "대형사 또는 타사와 비슷한 상품, 비슷한 전략으로 가면 우리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고 결코 성장할 수 없다"며 "우리는 현재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KB생명의 월납초회보험료(CMPI)는 한창 수수료 경쟁이 치열해지던 2018년 190억원에서 지난해 290억원으로 늘었다. 올해 목표는 330억원으로 지속적인 성장이 목표다.
이 상무는 "산업자체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룰 브레이커'가 돼야 한다. 룰을 깨야 우리에게 성장의 기회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룰이 바로 '수수료 중심의 보험상품 판매 구조'다.
수수료를 높인 상품은 보험료가 높은 만큼 고객에게 좋지 않지만 보험사 역시 신계약을 팔수록 손실을 본다. 받은 보험료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수수료로 지급하기 때문이다. 결국 계약이 장기간 유지돼 계속보험료가 들어오면서 보유계약이 늘어야지만 보험사의 이익으로 귀속된다. 결국 수수료 경쟁으로 신계약만 늘리고 계약이 유지되지 않을 경우 소비자도 보험사도 손실을 입게 되는 것이다.
보험의 복잡한 가정을 없애다
이정호 상무는 보험이 소비자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판매단에서 이뤄지는 '가정'들을 배제해야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보험에 가입할 때 소비자들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은 '추가납입을 하면, 공시이율이 그대로 유지되면, 해약하지 않으면'식의 가정"이라며 "이 가정이 만기까지 혹은 해약시까지 유지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가입시 설명들었던 것과 실제가 달라 고객들은 보험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KB생명이 확정금리를 적용하고 해지환급금을 명확히 하려는 이유다.
때문에 그는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무해지 종신보험'이 보험의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는 상품이라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이 상무는 "무해지 종신보험은 납입기간동안 해지환급금이 0%인데, 납입이 완료되는 시점엔 115%, 120% 등으로 튀는 극과 극을 이야기하는 상품"이라며 "보험료가 저렴하니 좋은 상품이라고 하지만 종신보험을 만기까지 유지하는 고객은 드물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손실을 보는 상품이며, 만약 유지되는 계약이 많다고 하면 보험사가 손실을 보는 상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상품이 명확해지기 위해서는 결국 '가정'을 배제해야 한다"며 "우리는 회사의 수익성이 낮다고 해도, 고객에게 약속할 수 없는 엄청난 수익률을 제시하며 불완전판매를 유발할 수 있는 상품을 판매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KB생명이 '약속'이란 이름의 상품들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가는 이유기도 하다.
온라인채널에서도 변화의 DNA를 깨우고 있다. 이성호 상무는 앞서 거론된 KB생명 온라인채널 브랜드인 '착한저축보험'을 통해 가능성을 봤다고 말한다.
그는 "그 상품을 통해 온라인 보험도 폭발력을 가질 수 있는 경험을 했다"며 "이러한 경험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고 말했다.
실제 당시 접속장애를 일으키며 'KB생명'의 이름을 알린 효과는 지난해 10월 유니콘기업인 토스(toss)와 손잡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정호 상무는 "현재 온라인 보험상품은 기존상품과 큰 차이 없이 수수료를 낮춘 상품을 판매하고 있지만 고객들은 이마저도 잘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며 "온라인상에서 보험고객이 원하고 인정할만한 서비스가 무엇인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의 상품은 무해지상품과 비교하면 비싸다. 다른 가정을 넣지 않고 확정금리를 제공하는 것도 한 이유다. 그러나 우리가 고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한 만큼 판매자들은 판매하기 쉽고 고객은 이해하기 쉽다. 모든 채널에서 고객의 기대가치에 맞는 상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이정호 상무는 이러한 철학을 이해하는 판매자와 고객들이 분명 KB생명의 손을 들어주리라 믿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보험사의 수익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 상품'들을 꾸준히 내놓을 생각이다. 이것이 고객이 원하는 것이며, 앞으로 보험사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보험상품의 패러다임의 전환, 이미 KB생명은 발걸음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