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임상수탁기관(CRO)인 씨엔알리서치가 수년간의 투자 사이클을 마치고 수확의 국면으로 본격 진입한다. 해외법인·IT 인프라·자회사 인수에 공을 들이던 '투자의 시간'이 끝나고, 글로벌 수주 급증과 AI 임상 적용으로 성과가 가시화되는 '수확의 시간'이 시작됐다.
오늘(30일) 주식병합을 마치고 진행되는 코스닥 거래 재개는 그 전환점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윤문태 씨엔알리서치 대표이사(회장)는 최근 비즈워치와의 인터뷰에서 "글로벌 시장 확장과 데이터 플랫폼 전환은 선택이 아닌 필연적인 도전"이라면서 "씨엔알리서치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대한민국 바이오 산업의 글로벌 영토를 넓히는 주역으로서 데이터 중심 글로벌 CRO의 가치를 증명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인터뷰에는 윤 대표 외에도 윤병인 경영총괄본부장(사장), 김수웅 브랜드실장(전무), 박병관 CDSA(Clinical Data Strategy & Analytics) 본부장(전무), 김진학 사업개발실장(상무) 등 핵심 경영진이 참여했다.
씨엔알리서치는 국내 인력 중심 임상시험수탁기관(CRO)에서 글로벌 임상과 의료데이터, AI를 결합한 '데이터 중심 글로벌 CRO'로 사업구조를 전환하고 있다. 회사가 제시한 세 가지 성장축은 글로벌 CRO와 데이터 CRO, 임상시험 전 과정을 지원하는 엔드투엔드 CRO다.
글로벌 수주 2배 육박…'데이터 CRO' 전환 속도
씨엔알리서치의 투자 성과는 수주에서 먼저 나타나기 시작했다. 씨엔알리서치의 올해 상반기 신규 수주는 지난해 연간 신규 수주액 532억원을 이미 넘어섰다.
수주 증가를 이끄는 것은 글로벌 프로젝트다. 다국가 임상 과제 매출은 2022년 28억원에서 2025년 95억원으로 3년간 3배 이상 늘었고,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같은 기간 6%에서 16%로 높아졌다. 올해 상반기에만 글로벌 프로젝트 수주액 183억원을 기록하며 지난해 연간 글로벌 수주액 95억원의 두 배에 육박하는 수주를 반년 만에 확보했다. 회사는 글로벌 수주 증가에 따라 내부 경영 목표도 상향 조정했다.
대표적인 성과는 대웅제약과 체결한 위궤양치료제 글로벌 임상 3상 계약이다. 여러 국가에서 진행되는 글로벌 임상은 국가별 규제에 대응하는 동시에 복잡한 임상 데이터 흐름을 실시간으로 관리해야 해 국내 임상보다 수행 난도가 높다.
김진학 씨엔알리서치 사업개발실장은 "대웅제약과의 글로벌 임상 3상 수주는 당사가 해외 탑티어 CRO 수준의 수행 역량을 인정받은 이정표"라며 "현재도 국내외 유수의 제약사들과 다수의 프로젝트 논의를 이어가고 있으며 하반기 성과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씨엔알리서치의 해외 진출 전략은 동남아시아와 미국을 각각 겨냥한 투트랙 방식이다.
동남아시아에서는 개량신약과 복합제, 백신 등의 임상시험을 중심으로 환자 모집 속도와 비용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미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다수의 복합제 임상을 수행했으며, 최근에는 백신 임상시험을 위해 베트남 시장으로 거점을 확대하고 있다. 신약 개발비와 국내 임상시험 비용이 상승하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빠른 환자 모집과 비용 효율성을 갖춘 동남아 시장을 선제적으로 개척한 것이 올해 수주 증가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미국에서는 혁신 신약을 중심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항암제와 합성신약, 바이오시밀러, 항체약물접합체(ADC), 디지털치료제 등의 과제에서 FDA 임상시험계획(IND) 승인을 지원한 경험을 바탕으로 규제 대응을 넘어 현지 임상시험 운영까지 사업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국내 제약·바이오기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아웃바운드뿐 아니라 미국 바이오텍의 한국·아시아 진출을 돕는 인바운드 사업도 확장한다. 현재까지 전 세계 20개국 이상에서 글로벌 임상 과제 94건 이상을 수행했다.
윤문태 대표는 "국내 인구 규모의 한계와 다인종 데이터 확보의 어려움이라는 벽을 넘어 아시안 글로벌 CRO로서 글로벌 20위권에 진입하는 것이 목표"라며 "단순한 외형 확장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차별화된 역량을 인정받는 CRO가 되겠다"고 강조했다.
AI 도입 원년…EDC부터 전사 업무까지 적용
씨엔알리서치는 올해를 AI 도입 원년으로 정하고 데이터 CRO 전환과 수익성 개선을 위한 핵심 수단으로 AI를 전사 업무와 임상 실무에 단계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씨엔알리서치는 글로벌 임상시험 IT 기업 타이메이 테크놀로지(Taimei Technology)와 계약을 맺고 임상시험 EDC(전자증례기록 시스템) 셋업 단계에 AI 에이전트를 국내에 론칭해 적용하고 있다. 회사 측에 따르면 EDC 셋업 단계에 AI 에이전트를 도입한 국내 첫 사례다.
기존에는 담당자가 임상시험계획서를 직접 읽고 분석해 EDC 구축에 필요한 사양을 만든 뒤 시스템에 입력해야 했다. 타이메이의 AI 에이전트는 임상시험계획서를 업로드하면 내용을 분석해 필요한 정보를 분류하고, EDC 셋업에 필요한 기본 사양을 자동으로 생성한다. 담당자가 생성된 결과를 확인한 뒤에는 AI가 다시 검수하는 방식이다.
외부 AI 솔루션 도입과 함께 자체 AI 에이전트 개발도 병행한다. 씨엔알리서치는 자회사 트라이얼인포매틱스(TI)와 데이터 관리, 임상 운영, 안전성 보고, 임상 문서 작성 등 CRO 핵심 업무에 특화된 AI 기능을 개발하고 있다.
향후에는 임상시험관리시스템(CTMS)과 리스크 기반 품질관리(RBQM), 통계분석, 임상시험결과보고서(CSR) 작성 등으로 AI 적용 범위를 넓힐 계획이다. 여러 임상시험 시스템에서 수집되는 데이터를 AI가 종합적으로 분석해 이상 징후와 누락, 불일치, 기관별 위험 등을 조기에 발견하는 방식이다. TI는 연내 8개의 AI 에이전트를 선보이고, 내년까지 업무별 AI 에이전트를 총 16개로 확대할 계획이다.
박병관 씨엔알리서치 CDSA 본부장(전무)은 "AI가 분석하거나 생성한 결과는 반드시 임상시험 전문가가 최종 검토하고 판단하는 체계를 유지한다"며 "임상시험은 규제 준수와 데이터 신뢰성이 핵심인 산업인 만큼 AI 시스템 역시 규제기관의 기준에 맞춰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회사가 기대하는 효과는 인력 감축보다 생산성 향상이다. 같은 인력으로 더 많은 임상시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해 매출 증가에 따른 인력 증가 속도를 낮추고, 장기적으로 CRO 사업의 수익성을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메디플렉서스·TI 자회사 연계…전주기 서비스 구축
의료데이터 사업도 본격화한다. 씨엔알리서치는 올해 초 헬스케어 데이터 전문기업 메디플렉서스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메디플렉서스는 대형병원의 환자 레지스트리를 통합해 의료데이터를 구축해온 기업이다. 씨엔알리서치는 메디플렉서스의 의료데이터와 기존 임상시험 수행 능력을 결합해 실사용데이터(RWD)·실사용근거(RWE)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전통적인 CRO 사업이 의약품 허가 전 임상시험 수행에 집중됐다면, RWE 사업을 통해 허가 후 조사와 관찰연구, 데이터 기반 비교 연구 등으로 서비스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신약 개발부터 허가 이후까지 의약품의 전체 생애주기에 관여하는 구조다.
씨엔알리서치와 메디플렉서스는 우선 신약 승인 이후 실시하는 위해성관리계획(RMP) 연구에 병원 임상데이터를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의 전향적인 시판 후 조사 방식에서 나아가 병원에 축적된 임상데이터웨어하우스(CDW)를 연구에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향후에는 희귀질환이나 윤리적으로 대조군을 두기 어려운 임상시험에서 RWD를 활용한 외부 대조군·합성 대조군 구축 사업으로도 확장할 계획이다.
기존 자회사와 관계사도 임상시험 전 주기를 잇는 역할을 맡는다. ABC바이오사이언스는 임상약리 전문가와 함께 초기 임상시험을 설계하고 IND 진입 위험을 사전에 조율한다. 씨엔알SMO는 연구간호사(CRC)를 병원에 파견해 임상시험 연구자를 지원한다.
GC녹십자와 공동 설립한 GCCL은 글로벌 센트럴랩 인프라를 기반으로 임상 검체 분석을 담당한다. 트라이얼인포매틱스(TI)는 임상시험 평가지표(Endpoint) 데이터 전주기를 통합 관리하는 Endpoint Platform 전문기업으로 임상시험 IT 시스템과 AI, 영상 바이오마커 기술을 제공한다. 여기에 메디플렉서스의 전자의무기록과 환자 데이터가 결합하면 임상 데이터와 의료영상, 검체 정보를 연결하는 전주기 임상시험 체계가 완성된다.
특히 TI는 현재 자체적인 외부 투자 유치도 진행하고 있다. 이르면 오는 7월 마무리가 목표다. 모회사 지원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체 기술과 사업모델을 기반으로 외부 자금을 유치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투자 유치가 완료되면 TI의 기술력과 독립적인 성장 가능성을 외부로부터 검증받는 동시에 AI·임상시험 IT 사업 확대를 위한 재원도 확보하게 된다.
윤병인 경영총괄본부장(사장)은 "자회사·관계사 네트워크를 통해 임상 운영에 데이터와 IT 플랫폼을 결합하면 인력을 투입한 만큼 매출이 늘어나는 기존 CRO 사업모델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며 "고부가가치 사업 비중을 확대해 수익성 구조 자체를 바꿔나가겠다"고 말했다.
수주 성과 실적으로…외형 성장·수익성 개선 동시 추진
선제 투자가 매출과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지는지가 향후 핵심 관전 포인트다.
씨엔알리서치는 최근 5년간 연평균 10% 이상 성장하며 매년 최대 매출을 경신했다. 다만 해외 진출과 IT 인프라 구축, 자회사 인수 비용이 늘어난 데다 자금난을 겪은 일부 바이오기업과 관련한 대손상각이 발생하면서 영업이익률은 둔화했다.
회사측은 올해 매출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는 동시에 영업이익도 지난해보다 크게 개선될 것으로 내다봤다. 글로벌 프로젝트 수주가 빠르게 늘면서 외형 성장을 이어가는 가운데, AI를 활용해 같은 인력이 수행할 수 있는 임상시험 과제가 늘어나면 수익성도 추가로 개선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해외법인·IT 인프라·인수합병에 투입한 선제 투자를 실적으로 회수하는 '수확의 시간'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수웅 씨엔알리서치 브랜드실장은 "국내 CRO 시장은 경쟁이 치열하고 가격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며 “한정된 시장에서 점유율 경쟁을 벌이기보다 글로벌과 데이터 등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시장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것이 씨엔알리서치가 가야 할 방향"이라고 말했다.
코스닥 시장에서 주주환원 정책도 강화한다. 지난해 처음으로 현금배당을 실시한 데 이어 정기 현금배당을 지속하고, 하반기에는 추가적인 주주친화정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윤문태 씨엔알리서치 대표이사는 "일시적인 부양보다 단단한 펀더멘털로 기업 가치를 증명해 보이겠다"며 "창업 이래 우리 기술로 만든 신약이 글로벌 시장에 출시되는 여정에 핵심 파트너로 함께하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