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약품이 글로벌 제약사 로슈와 최대 23억달러(원화 3조1890억원)의 대규모 기술수출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시장의 미세한 변화를 날카롭게 짚어낸 회사의 '촉'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차세대 비만치료제의 핵심 과제로 떠오른 '체중감량의 질'을 겨냥해 새로운 기전에 선제적으로 도전한 한미약품의 판단이 빅파마 전략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다.
27일 업계에 따르면 GLP-1(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 계열 치료제가 비만치료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동안 한미약품은 체중을 얼마나 많이 줄이느냐보다 그 과정에서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지킬 것인지에 주목했다. 지방은 최대한 줄이면서 제지방과 근육, 신체 기능은 보존하자는 차별화된 접근법이다.
한미약품은 이를 실제 신약개발 과제로 끌어들였다. '코르티코트로핀 분비인자 수용체 2형(CRFR2)'을 선택적으로 활성화하는 '장기지속형 유로코르틴 2(UCN2) 유사체라'는 도전적인 과제를 추진한 것이다.
펩타이드 설계와 장기지속형 기술, 비만·대사질환 연구 등 축적해온 연구개발(R&D) 역량을 집중해 체성분 개선을 겨냥한 새로운 비만치료제를 구체화한 결과물이 HM17321이다. HM17321은 이번에 한미약품이 로슈 그룹과 기술수출 계약을 맺은 비만 신약 후보물질이다.
'얼마나 빼나'에서 '어떻게 빼나'로
글로벌 비만치료제 시장은 세마글루타이드와 티르제파타이드 등 인크레틴(GLP-1 등 장호르몬) 기반 치료제 등장으로 급성장했다. 이로 인해 체중감량 효과 자체는 크게 높아졌지만 체중이 줄어드는 과정에서 지방뿐 아니라 근육을 포함한 제지방도 함께 감소할 수 있다는 한계 역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실제 임상 현장에서도 감량 체중의 상당 부분이 근육 등 제지방 손실로 이어지는 현상이 확인되면서, 글로벌 비만 신약 시장의 경쟁 축은 단순한 '체중 감량률'에서 '체성분과 근기능 보존'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한미약품은 일찌감치 이 문제를 연구개발 목표로 설정했다. HM17321의 비임상 연구를 통해 지방량 감소와 동시에 제지방을 보존하거나 증가시키는 결과를 반복적으로 입증했으며, 비만 영장류에서도 체성분 개선을 동반한 체중 변화 가능성을 확인했다.
기술가치평가 및 바이오 사업개발 전문가인 이정희 디지털사이언스 대표는 "GLP-1 이후 비만약 경쟁의 핵심은 단순 감량 수치가 아닌 감량 과정에서의 체성분 최적화"라며 "지방은 더 줄이고 제지방과 근육, 신체 기능은 보존하려는 글로벌 시장의 새로운 요구를 한미약품이 한발 앞서 파이프라인으로 구현했다"고 말했다.
까다로운 신규 기전 개척…빠른 사업화로 전환
UCN2는 개발 난도가 매우 높은 기전이다. 체내 펩타이드인 유로코르틴 2(UCN2)는 특정 수용체인 CRFR2와 결합해 지방 분해를 촉진하고 골격근 형성에 관여하지만, 동시에 심혈관계에도 직접 작용한다. 원하는 대사 개선 효과를 얻으면서도 혈압과 심박수 같은 안전성 리스크를 정밀하게 관리해야 하는 까닭에 신약으로 구현하기 까다로운 타깃으로 꼽힌다.
한미약품은 자체 펩타이드 설계 및 장기지속형 기술, 구조 기반 연구 역량을 집중해 이를 신약 후보물질로 구체화했다. 2024년 11월 비임상 결과를 처음 공개한 이후 미국당뇨병학회(ADA)와 유럽당뇨병학회(EASD) 등을 거치며 설치류와 영장류 모델에서 데이터를 탄탄히 쌓았고, 아밀린 유사체 병용 및 근감소증 모델까지 아우르는 종합 데이터 패키지를 구축했다.

연구 성과를 신속하게 사업개발로 전환한 실행력도 돋보였다. 2024년 11월 주요 비임상 데이터 공개 후 약 1년 만인 2025년 11월 미국 임상 1상에 진입했고, 임상 개시 후 불과 9개월 만에 글로벌 빅파마와의 라이선스 계약을 성사시켰다.
이정희 대표는 "비임상 데이터 공개에서 임상 1상 진입까지 1년, 1상 개시에서 빅파마 계약까지 9개월이 걸렸다"며 "시장의 미충족 수요를 연구개발 과제로 정의하고 이를 실제 사업개발 성과로 빠르게 연결해낸 속도에 주목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한미약품이 선제적으로 입증한 UCN2 기전의 잠재력은 최근 글로벌 신약개발 지형에서도 뚜렷하게 확인된다. 덴마크 구브라(Gubra)가 장기지속형 UCN2 유사체 'GUB-UCN2'로 임상 1/2a상에 진입했고, 미국 뉴로크라인 바이오사이언스(Neurocrine Biosciences)와 국내 디앤디파마텍 등도 잇따라 유사 기전 파이프라인 개발에 가세했다. 한미약품이 앞서 개척한 경로가 글로벌 차세대 개발 축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한미가 본 시장 니즈, 로슈 전략과 맞아떨어져
이번 대규모 기술이전은 한미약품이 HM17321을 통해 겨냥한 시장의 미충족 수요가 로슈가 확장해온 차세대 비만치료 전략과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분석이다.
로슈는 현재 GLP-1/GIP 이중작용제 에니세파타이드를 중심으로 아밀린 유사체 페트렐린타이드, 근육 보존을 겨냥한 마이오스타틴 억제 전략 등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 단순히 체중을 많이 줄이는 약 하나에 집중하기보다 서로 다른 기전을 조합해 체중감량 효과와 내약성, 체성분 개선까지 함께 잡겠다는 전략이다.
로슈는 최근 비만치료의 주요 미충족 수요 가운데 하나로 '근육량 보존'을 지목하고 기존 인크레틴과 다른 신규 작용기전 확보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에니세파타이드와 페트렐린타이드의 고정용량복합제 개발에 나선 것도 단일 기전보다 다양한 조합을 통해 환자별 치료 효과를 높이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HM17321은 이 같은 전략과 접점이 크다. 기존 GLP-1·GIP나 아밀린과 겹치지 않는 비인크레틴 신규 기전이면서 비임상에서 지방 감소와 제지방 보존·증가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한미약품이 아밀린 유사체와 마이오스타틴·액티빈 억제제 등을 활용한 병용 연구까지 진행해왔다는 점도 향후 다양한 치료 조합을 검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로슈 역시 이번 계약에서 지방을 선택적으로 줄이면서 근육량과 근기능을 개선하는 치료전략을 강조했다.
결국 한미약품이 일찌감치 포착한 '체중감량의 질'이라는 시장의 니즈와, 인크레틴 이후 새로운 기전과 병용전략을 찾던 로슈의 비만사업 방향이 맞아떨어지면서 이번 기술수출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초기 단계서 입증된 가치…임상 검증 과제
이번 계약 조건은 글로벌 시장에서 HM17321의 기전적 잠재력과 파이프라인 가치를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미약품은 이번 계약으로 반환 의무가 없는 선급금 1억9000만달러(약 2630억원)를 확보했다. 향후 개발·허가·상업화 단계별 마일스톤을 포함한 총 계약 규모는 최대 23억달러에 달하며, 순매출에 따른 판매 로열티는 별도다.
특히 전체 계약 규모의 약 8.3%에 달하는 선급금 비중은 임상 1상 단계 자산이라는 점은 물론, 국내 다른 기술이전 계약과 비교해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는 평가다. 한미약품이 구축한 비임상 데이터의 완성도와 상업적 잠재력을 빅파마가 그만큼 신뢰했다는 방증이다.
HM17321의 궁극적인 성패는 인체 대상 임상에서 갈릴 전망이다. 비임상에서 확인한 지방 감소 및 제지방 보존 효과가 사람에게서도 재현되는지, 심혈관계 안전성을 안정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지가 핵심 관건이다. 한미약품이 진행 중인 임상 1상이 마무리되면 임상 2상부터는 제넨텍이 글로벌 개발을 주도한다.
업계 관계자는 "모두가 감량률 경쟁에 몰두할 때 시장의 다음 과제인 체성분 개선을 먼저 읽고 도전적인 신규 기전에 R&D 역량을 집중한 것이 이번 대형 기술수출의 배경"이라며 "시장의 미충족 수요를 선제적으로 포착해 신약 파이프라인으로 빠르게 구현해 내는 능력이 곧 제약바이오 R&D의 핵심 경쟁력임을 보여준 사례"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