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여 년 전만 해도 GLP-1(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 계열은 당뇨병 환자의 혈당을 낮추는 약이었다. 그런데 치료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변화가 나타났다. 환자들의 체중이 함께 줄어든 것이다. 이 우연한 발견은 비만 치료제의 출발점이 됐고, 결국 글로벌 제약·바이오 산업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GLP-1 계열 약물은 이제 비만 치료제에서 더 나아가 심혈관질환, 신장질환, 폐쇄성 수면무호흡증, 대사이상 관련 지방간염(MASH) 등으로 거침없이 영토를 넓히고 있다.
당뇨약 맞았더니 체중 감소…비만 시장 열다
GLP-1은 음식물 섭취 시 소장에서 분비되는 인크레틴 호르몬이다. 혈당 수치에 맞춰 인슐린 분비를 촉진하고 글루카곤 분비를 억제해 혈당을 조절한다.
첫 상용화는 2005년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은 '바이에타(엑세나타이드)'였다. 이후 노보 노디스크의 '빅토자(리라글루타이드)', '오젬픽(세마글루타이드)' 등이 차례로 시장에 진입했다.
개발 과정에서 흥미로운 현상이 포착됐다. 혈당 강하뿐 아니라 환자들의 체중이 유의미하게 감소한 것이다. GLP-1이 췌장뿐 아니라 중추신경계의 식욕 조절에 영향을 미쳐 포만감을 높이고 음식 섭취량을 줄인 덕분이었다.
제약사들은 방향을 틀었다. 노보 노디스크는 빅토자의 용량을 높여 2014년 비만 치료제 '삭센다'로 허가받았다. 2017년 주 1회 당뇨약으로 등장한 오젬픽 역시 2021년 비만 치료제 '위고비'로 재탄생했다. 일라이 릴리도 GIP·GLP-1 이중작용제 티르제파타이드를 당뇨약 '마운자로'에 이어 2023년 비만약 '젭바운드'로 선보였다.
당뇨병 치료 과정에서 확인된 체중감량 효과가 거대한 비만 치료제 시장을 연 것이다. 이 약물의 폭발적인 흥행에 힘입어 노보 노디스크는 본국인 덴마크의 연간 국내총생산(GDP)을 웃도는 시가총액을 기록하며 유럽 증시 1위 기업으로 도약하기도 했다.
살 빠지니 심장도 개선…신장·수면·간으로
GLP-1의 진화는 비만이 다양한 대사·심혈관질환의 위험요인이라는 점에 착안해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체중을 대폭 줄이면 비만과 연관된 질환의 위험도 함께 낮출 수 있을 것이란 가설이었다.
대규모 글로벌 임상이 이를 입증하기 시작했다. 심혈관질환을 앓는 과체중·비만 성인에게 위고비를 투여한 임상 3상에서 심혈관 사망·심근경색·뇌졸중 등 주요 심혈관 사건 위험이 위약군 대비 20% 줄었다. FDA는 2024년 위고비에 심혈관 위험 감소 적응증을 추가했다. 체중 감량을 넘어 심혈관 사건을 줄이는 임상적 효과까지 인정받은 것이다.
신장으로도 영역을 넓혔다. 세마글루타이드는 제2형 당뇨병과 만성콩팥병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대규모 임상에서 신장질환 악화와 심혈관 사망 위험을 유의하게 낮췄다. 이를 토대로 FDA는 2025년 오젬픽에 제2형 당뇨병과 만성콩팥병이 있는 성인의 신장질환 악화 및 심혈관 사망 위험 감소 적응증을 추가했다.
뜻밖의 영역에서도 성과가 나왔다. 비만이 주요 위험요인인 폐쇄성 수면무호흡증이다. 릴리의 젭바운드는 임상 3상에서 시간당 무호흡·저호흡 지수를 크게 낮추며 2024년 12월 미국에서 비만 성인의 중등도~중증 폐쇄성 수면무호흡증 치료제로 승인받았다. FDA가 승인한 최초의 폐쇄성 수면무호흡증 약물 치료제였다.
간 질환으로도 이어졌다. 비만과 인슐린 저항성이 주요 위험요인인 MASH 분야에서 위고비는 임상에서 효과를 입증해 2025년 8월 중등도~진행성 간 섬유화를 동반한 MASH 치료제로 FDA 가속승인을 획득했다.
당뇨에서 비만으로, 다시 비만과 밀접하게 연결된 전신 질환으로 적응증이 도미노처럼 이어진 것이다.
뇌질환 벽엔 부딪혔지만…신규 적응증 탐색 계속
연구진의 시선은 결국 뇌로도 향했다. 전임상 연구와 실제 환자 데이터, 기존 당뇨·비만 임상의 사후분석 등에서 GLP-1 계열 약물이 신경염증과 신경퇴행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시사하는 신호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결국 노보 노디스크는 경구 세마글루타이드가 초기 알츠하이머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3808명 규모의 대규모 임상 3상에 돌입했다.
하지만 뇌의 장벽은 높았다. 2025년 공개된 결과에서 세마글루타이드는 일부 알츠하이머병 관련 바이오마커에는 긍정적인 변화를 보였지만 환자의 실제 인지·일상 기능 저하를 늦추는 1차 평가지표 입증에는 실패했다. GLP-1 역시 모든 질환에 통하는 '만능약'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다.
GLP-1의 영토 확장이 끝난 것은 아니다. 비만을 동반한 무릎 골관절염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에서 세마글루타이드는 체중 감소와 함께 통증 개선 효과를 보였다. 알코올사용장애에서도 폭음과 음주량, 알코올 갈망 등을 줄일 가능성이 확인되고 있다. 아직 연구 단계지만 GLP-1의 영역이 대사질환을 넘어 관절과 중독 분야까지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20여 년 전 혈당을 낮추기 위한 당뇨병 치료제로 출발했던 GLP-1은 이제 단순한 약물을 넘어 전신 대사질환을 아우르는 '치료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알츠하이머라는 높은 벽에서는 한 차례 멈춰 섰지만, GLP-1의 다음 목적지를 찾기 위한 글로벌 제약사들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