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첫 반도체 생산공장(팹)을 2029년까지 완공하겠다며 속도전에 나섰습니다. 2028년 중순까지 광주 군 공항 기능을 다른 군 기지로 임시 이전한 뒤 곧바로 착공, 일본 구마모토 TSMC 공장보다 빠르게 생산거점을 구축한다는 구상인데요. 인공지능(AI)발 반도체 호황과 글로벌 증설 경쟁에 대응해 국내 생산능력을 선제적으로 확보하겠다는 취지로 읽힙니다.
문제는 '2029년'이라는 시간표의 현실성과 산업적 타당성입니다. 군 공항 이전부터 국가산업단지 조성·인허가·전력 및 용수 확보까지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한 가운데 실제 팹 건설에 주어진 시간은 약 1년 6개월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글로벌 신규 생산능력이 본격적으로 늘어나는 2028년 이후엔 메모리 수급이 지금과 달라질 가능성도 있고요. 속도전에 앞서 2029년 완공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그 시점에도 추가 생산능력이 필요한지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李 "속도전 넘어 전격전"
13일 산업통상부 등에 따르면, 정부는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의 팹 1차 완공 시점을 2029년으로 잡았습니다. 구체적인 완공 목표가 정부 차원에서 제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요.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지난 11일 국무회의에서 "2029년 반도체 팹 1차 완공을 목표로 국토교통부를 중심으로 국가산업단지 조성·산업단지 수립 계획 등을 빠른 속도로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정부는 오는 10월 국가산단 입주 협약을 맺고 11~12월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절차를 밟을 예정입니다. 내년에는 인허가·설계·일부 부지 정비를 진행하고요. 2028년 광주 군 공항 부지를 넘겨받는 즉시 팹 건설에 착수한다는 계획입니다.
1차 완공 규모로는 팹 1~2개가 거론됩니다. 다만 실제 규모와 시점은 부지 확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전체 부지를 확보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공사가 가능한 곳부터 순차적으로 개발해 팹 1개를 먼저 짓는 방안도 가능합니다.
첫 관문은 광주 군 공항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0일 '3대 메가프로젝트 2차 민관 합동 점검회의'에서 국방부에 "2028년 중순까지 광주 기지 기능을 다른 군 공항으로 임시 배치해 광주 군 공항 부지가 반도체 산업단지로 조기에 활용될 수 있도록 조치해 달라"고 지시했습니다. "임시 배치가 끝나기 전이라도 군 공항 인근에서 산단을 조기 착공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도 언급했죠.
국방부도 관련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이전 방식과 대상 기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KF-21 전력화 등에 따라 다른 공군 기지의 수용 여력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오는데요. 전투기 운용과 훈련에 차질이 없도록 광주 기지 기능을 분산 배치할 곳을 찾는 게 과제입니다.
군 공항을 운영하는 동안 인근에서 대규모 공사를 병행할 수 있을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전투기 이착륙과 비행훈련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산단 공사가 군 작전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어서죠. 활주로 등 관련 시설을 다른 기지에 추가로 갖추는 데 드는 비용도 변수입니다.
이 대통령은 사업 추진에 강한 속도전을 주문했습니다. "속도전을 넘어 전격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라며 일본 구마모토를 직접 언급했는데요. 그는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경우 일본 구마모토에 못지않은 속도로 신속하게 집행됐으면 좋겠다"며 관련 절차를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해 소요 시간을 줄여달라고 당부했습니다.
호남 '맨땅의 클러스터'
정부가 제시한 시간표를 맞추려면 팹 건설 자체도 전례 없는 속도로 진행해야 합니다. TSMC의 구마모토 공장은 2022년 4월 착공해 2024년 2월 준공되기까지 약 1년 10개월이 걸렸는데요. 호남은 2028년 6월께 착공해 2029년 말 완공한다고 가정하면 약 1년 6개월 만에 첫 팹을 지어야 합니다.
대규모 클린룸과 각종 유틸리티 시설이 필요한 반도체 팹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상당히 공격적인 일정입니다. 전문가들은 공사 기간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착공 전에 설계·인허가와 기반시설 준비를 최대한 마쳐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안정적인 전력과 용수 공급이 필수입니다.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에 필요한 전력은 6.3기가와트(GW), 용수는 하루 65만톤으로 추산됩니다.
정부는 당초 2029년 말이었던 1단계 전력 공급 시점을 2028년 말로 1년 앞당길 계획인데요. 초기에는 산단 인근 345킬로볼트(㎸) 신장성~신광주 송전선로 등 기존 전력망을 활용, 지역 내 재생에너지·에너지저장장치(ESS)·열병합·액화천연가스(LNG) 발전도 병행할 방침입니다.
향후 팹이 추가로 들어서면 별도의 전력망도 필요합니다. 한빛원전에서 광주 군 공항까지 345㎸ 송전망을 새로 연결해야 하는데요. 대규모 전력망 건설에는 통상 5~10년이 걸리는 만큼 정부는 관련 인허가 절차를 단축해 구축 시기를 최대한 앞당긴다는 계획입니다.
용수는 섬진강·영산강 수계 8개 댐의 저류량을 조절하고 하수 재이용과 지하수 저류댐 등을 활용해 확보합니다. 이를 통해 계획된 팹 4기에 필요한 물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입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핵심은 2028년부터 시작해 2029년에 끝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2026~2027년에 행정·설계·인허가와 전력·용수 확보를 얼마나 선행하느냐에 있다"며 "팹 건설과 기반시설 공사를 병렬적으로 진행해야 2029년 목표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군 공항 이전·산단 지정·인허가·전력 및 용수 공급 까지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추진해야 한다"며 "정부와 기업이 모든 절차를 패스트트랙으로 밀어붙여야 가능한 도전적인 목표"라고 평가했습니다.
구마모토처럼?…산업 생태계는 딴판
속도 못지않게 따져봐야 할 것은 입지의 출발 조건입니다. 구마모토가 속한 일본 규슈는 오래전부터 반도체 산업이 발달해 '실리콘 아일랜드'로 불려왔는데요. 소니를 비롯한 전자·반도체 기업과 협력업체가 자리 잡고 있었고 제조업 인력과 물류 등 관련 산업 기반도 형성돼 있었습니다. TSMC는 이미 갖춰진 생태계 위에 공장을 얹은 셈이죠.
▷관련기사: "한국전력 하나 더 필요"…'800조' 호남 반도체의 숙제(2026년 7월16일)
호남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평탄화된 대규모 군 공항 부지를 활용할 수 있어 부지 조성에는 유리하지만 구마모토가 이미 갖춘 반도체 산업 기반을 호남은 새로 구축해야 합니다.
'2029년'이라는 시간표 자체가 지나치게 촉박하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행정 절차를 미리 밟아 놓더라도 팹 건설과 생산설비 구축에 필요한 물리적인 시간을 크게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건데요.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전력·용수·인허가 등 사전 작업을 최대한 앞당길 수는 있겠지만 기반시설이 갖춰진다고 해도 팹을 짓는 데는 통상 2~3년을 잡아야 한다"며 "2028년 하반기에 부지를 확보해 2029년까지 공장을 완공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팹을 완공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안정적으로 가동하려면 주변 산업 생태계가 함께 갖춰져야 하는데요. 반도체 생산에는 제조장비·특수가스·화학재료를 비롯한 각종 부품과 소모품이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장비 유지·보수를 맡을 협력업체와 인력도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죠.
이 관계자는 "중국 시안이나 우시의 반도체 생산거점을 보면 공장 주변에 가스와 장비 업체 등 협력사들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며 "호남도 팹 하나를 짓는 데 그치지 않고 장비와 소재·소모품을 공급하고 유지·보수할 기업들이 함께 들어오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초고속 시간표…산업적 셈법은?
정부가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서두르는 배경에는 AI발 반도체 호황과 글로벌 증설 경쟁이 있습니다. 시장조사업체 시그마인텔은 올해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가 약 1조5870억달러(2250조원)로 전년보다 107% 성장하고, 내년에는 약 2조달러(28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는데요.
특히 메모리 시장의 성장세가 가파릅니다. 올해 세계 메모리 시장은 약 9600억달러(1360조원)로 전체 반도체 시장의 60%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HBM 시장만 140조원을 넘어설 전망이고요. AI 서버용 메모리 수요가 공급을 웃돌면서 D램과 낸드 가격도 급등하고 있습니다.
수출도 반도체가 이끌고 있습니다. 이달 1~10일 반도체 수출은 전년 동기보다 155.4% 늘어난 100억달러(14조원)로 같은 기간 역대 최대를 기록했습니다.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6.8%까지 높아졌죠. 올해 2분기 전기전자 수출은 109.8% 증가한 1604억달러(227조원)로 전체의 58%를 차지한 바 있습니다.
다만 지금의 호황이 호남 팹이 가동될 시점까지 이어질지는 불확실합니다. 글로벌 신규 생산능력이 본격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2028년 이후에는 공급 부족이 완화되면서 메모리 수급과 가격이 지금과 다른 국면에 접어들 가능성이 있는데요. 현재의 시장 상황만으로 2029년 이후 필요한 생산능력을 가늠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이미 대규모 투자가 진행 중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의 역할 조정도 필요합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용인을 중심으로 생산시설을 순차적으로 늘리는 상황에서 호남까지 동시에 속도를 낼 경우 전력·용수와 전문인력은 물론 정부의 재정·행정 지원도 분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업계 일각에서 나옵니다.
추가 클러스터가 필요하더라도 '왜 호남인가'에 대한 산업적 근거는 분명해야 합니다. 호남에 새 생산거점을 조성하려면 상당한 선행 투자가 필요한 만큼 비용·공급망 연계성·인력 확보·확장성 등을 다른 후보지와 비교해 입지 경쟁력을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인데요. 정부가 사업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기반시설 구축을 서두르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호남의 기존 산업 기반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앞선 관계자는 "정부가 2029년을 첫 팹 완공 목표로 제시한 것을 두고 산업적 필요성보다 현 정부 임기 내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무게를 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며 "반도체 클러스터는 수십 년을 내다보고 조성해야 하는 장기 프로젝트로, 특정 완공 시점을 먼저 정하기보다 향후 반도체 수급·기업 투자 계획·기존 클러스터와의 역할 분담 등을 함께 따져야한다"고 말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