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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소통, 거시기

  • 2013.06.01(토) 15:12

<정보통신 기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만 우리 사회는 오히려 `소통의 빈곤`에 처해 있습니다. 소통의 빈곤은 `갈등`을 낳고 이는 어마어마한 `비용`으로 돌아옵니다. 이 코너는 주변과의 원활한 소통을 통해 우리 사회가 더욱 건강해지고, 나아가 대통합을 이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마련됐습니다. 필자는 기업문화향상 교육 서비스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영감, 거시기 하셨슈?”

“ 근께, 한참 전에 혔는디. 임자도 거시기 혔는가?”

“ 지는 거시기 혀서, 저녁에나 혈 수 있것는디.”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미스터리 한 대화 장면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갓 서른 무렵, 여행지 민박 주인 어르신 내외는 암호 같은 단어, 거시기만으로 거의 모든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거시기 어디 있냐고 하면 할아버지가 주방에서 소쿠리를 내어 왔고, 할아버지가 거시기 하다시면 할머니가 냉수를 떠다 드렸다. 전혀 불편하지 않은 자연스럽고 막힘 없는 소통이었다.

 

사전에서 ‘거시기’를 찾아보면 ①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 ②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가 거북할 때 쓰는 군소리. 라고 정의되어 있다. 아무거나 될 수 있고 어디에나 쓸 수 있는, 거시기란 단어는 분명 흔치 않은 효율적인 말이었다.

 

그렇지만 어르신 내외는 매 순간 달라지는 그 많은 거시기들을 어떻게 혼돈 없이 쓸 수 있는 걸까? 그 애매모호한 단어로 오해 없이 뜻을 전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명확한 언어 전달과 확실한 의미해석이 소통의 정답이라고 여겼던 그 무렵, 나에게 거시기 대화는 마치 풀기 어려운 수학문제 같았다.

 

십 여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소통을 화두로 연구 중인 나는 운이 좋게도 다양하고 색다른 소통체험을 할 수 있었다. 짧은 영어와 가벼운 프랑스어만으로 3년째 프로젝트를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스페인 친구가 생겼고, 아프리카 케냐, 탄자니아에서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어린아이들의 사진을 찍으며 보름 가량 봉사활동을 했다. 몽골에서 몸짓 발짓으로 친구를 사귀기도 했고, 우리 말을 미처 배우지 못한 다문화 가정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사진 수업도 해봤다. 피부색이 다르고 사는 곳과 말이 다른 그들과 함께 했던 그 시간 동안 나는 신기하게도 소통의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확실하지 않을 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면 그들은 지치지 않고 웃으며 재차 삼차 온 몸으로 이해를 시켜 주었고, 그래도 안 통하면 그림과 사진까지 동원해 설명하는 노력을 보였다. 물론 나의 짧은 외국어 실력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같은 말을 쓰지 않아도 상대의 호의를 읽어 낼 수 있었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원하는 바를 감지할 수 있었다. 소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통하고자 하는, 그래서 서로를 향해 촉을 맞추는 의지와 노력임을 체험으로 깨달았다.

 

2013 올해 광주에서 열리는 디자인 비엔날레의 주제는 ‘거시기, 머시기’이다. 거시기, 머시기란 단어는 불특정하고 무의미한 기표(記標)로 쓰이지만, 주고 받는 이들에게는 서로 통하고 친근한 매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소통과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는 게 주최측의 설명이다.

 

예쁘게 로고화 된 거시기,머시기 포스터를 들여다보다 문득 민박 주인 어르신 내외의 거시기 대화가 떠올랐다. 그 많은 사물들을 거시기라는 한 마디로 다 싸잡아 대충 이야기를 해도 척척 통하는 건 이미 오랜 세월 두 분 사이에 쌓여 온 깊은 이해와 촉 맞추기 덕분 아닐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소통을 고민 중이다. 어떻게 해야 소통이 두통이 되지 않을 지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전략을 짜고 실행방법을 찾기에 분분하다. 말과 글로 서로의 생각을 열심히 토로하지만 오해 없이 이해 시키기가 쉽지 않고, 벌어진 간극은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다. 불현듯,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빠졌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정말 서로를 향해 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촉을 세우고 있는 걸까? 혹시 입으로는 소통을 외치면서 시선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두고 있는 건 아닐까?

 

신기하게만 보였던 시골 어르신 내외의 거시기 대화는 이제 내게 궁극의 소통 모델이 되었다. 그저 “거시기 하네” 한 마디로 만사 해결되는, 뻥 뚫린 사회를 꿈꾼다면, 나는 로맨티시스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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