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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법개정안 논란]2-② SK사례 '소버린의 악몽'

  • 2013.08.06(화) 11:36

재계와 다수의 학자들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상법 개정안에 '독소조항'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예로 드는 케이스가 바로 SK-소버린 사태. 이 역시 꼭 10년 전 일이다.

 

◇ "한국의 기업 지배구조를 바꾸겠다"

 



2003년 봄 SK그룹은 엉망진창이었다. 당시 최태원 회장 등 SK그룹 경영진은 검찰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었다.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에서 1조5000억원이 넘는 초대형 분식회계를 한 사실이 적발됐다. JP모건과 옵션 이면계약을 체결해 회사에 1000억원이 넘는 손해를 끼쳤다는 혐의도 받았다.

 

분식회계로 미국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던 엔론사태의 한국판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부도덕한 기업이라는 여론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주식시장의 반응 역시 싸늘했다. 투자자들은 SK그룹 계열사 주식을 외면했고, 주가는 거의 반토막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1만~2만원대를 오가던 SK㈜의 주가는 5천원대까지 추락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낯선 이름의 한 외국계 증권사가 SK㈜를 야금야금 사들이고 있었다. 2003년 4월 금융감독원에 보고서를 내면서 그 실체를 드러낸 증권사는 '크레스트 시큐리티즈'. 모나코에 있는 소버린자산운용의 100% 자회사였다.

 

☞ 소버린자산운용 :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리처드 챈들러와 크리스토퍼 챈들러 형제가 1972년 뉴질랜드에서 시작한 조그만 무역회사로 출발했다. 이들은 무역업으로 돈을 번 뒤 1986년 유럽의 대표적인 '무조세지역' 모나코로 회사를 옮겨 주력 업종을 무역에서 금융투자로 바꾼다. 주로 아시아, 동유럽, 남미 등 경제 기반이 취약한 국가들을 돌며 부동산, 주식 등에 투자해 막대한 투자이익을 거두며 뉴질랜드 최고 부호 반열에 오른다.

 

소버린자산운용의 창업주인 챈들러 형제는 국내 최대 정유회사이자 SK그룹의 지주회사인 SK㈜의 지분을 이미 8.64% 확보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한 뒤 계속 주식을 매입했다. 이 소식에 주가는 급반등하며 시장과 투자자들은 낯선 소버린의 입성을 환영했다. 4월 14일 크레스트증권은 보도자료를 통해 "크레스트증권의 목표는 주주가치를 확립하며 SK㈜를 한국에서 기업 지배구조의 모델 기업으로 바꾸도록 경영진과 건설적으로 작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꾸준히 매입을 지속하던 크레스트증권은 주당 평균 9293원에 SK㈜ 주식 1902만여주를 사들여(총 1689억원) 자산 규모 17조원 기업의 1대 주주(14.99%)로 등극했다. 당시 최태원 회장 등 총수 일가의 직접 지분은 1.39%에 그쳤다. 외국자본이 시장에서 지분을 매입해 재벌기업의 최대주주가 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 1조원의 '먹튀'

 

2003년 6월 최태원 회장은 1심 재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다시 2004년 1월 손길승 SK그룹 회장이 1조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구속됐다. 바로 이때부터 소버린의 1조원대 먹튀 시나리오가 가동된다.

 

3월 주주총회를 앞두고 소버린은 최태원 회장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다. 소버린측은 SK그룹과 독립적인 위치에서 SK㈜의 경영에 참여할 사외이사 5명을 추천하고 정관 개정안을 제안한다. 특히 SK그룹 경영진을 상대로 이런 폭탄선언도 했다. "주주들에게 피해를 입힌 범죄자들을 이사회 이사로 둬서는 안된다. 회사 창립자의 아들, 최태원 회장도 마찬가지다"

 

소버린은 누구 보란듯이 사내·사외 이사의 자격 조건을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되지 않은 자'로 통일하자고 했다. SK는 사외이사에게만 이런 자격 조건을 뒀다. 소버린의 이같은 주장에 동조하는 주주들은 많지 않았다. 결국 소버린은 '이사해임의 안'(최태원 회장 해임)과 '정관변경의 안'(전과자 이사선임 금지) 등 안건을 놓고 벌인 주총 표대결에서 완패했다.

 

소버린은 이후 1년 간 임시주주총회를 열자며 소송을 이어갔고, 이듬해인 2005년 3월 주총에서 또 한 번 패배했다. 결국 소버린은 같은해 6월 SK㈜의 보유 목적을 '경영 참여'에서 '단순 투자'로 바꾼다. 이후 한 달 외국계 투자가들과의 극비리 작업 끝에 소버린은 7월 18일 SK㈜ 주식 전량을 처분했다. 매매 차익과 배당금, 환차익을 합산하면 9437억원. 불과 2년4개월 만에 투자금의 4배, 1조원에 가까운 수익을 거둔 것이다.

 

◇ 상법 개정안의 함정

 

소버린은 2004년 말 지분 14.99%를 5개 자회사 펀드에 3%씩 분산시켰다. 리스크 관리 차원이라고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소버린이 원하는 인물을 감사위원으로 선출하기 위한 꼼수였다. 왜냐하면 증권거래법에 따라 최대주주인 SK그룹 계열사와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은 3%로 제한됐고, 3%씩 5개로 분산한 소버린은 15%의 의결권을 모두 행사할 수 있었다.

 

이번 상법 개정안이 강제하는 감사위원 분리 선출과 3%룰 적용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 소버린이 당시 주총에서 SK와 표 대결에 나섰던 안건이 집중투표제와 전자투표제다. 법무부는 상법 개정안을 통해 해외 투기자본이 요구해온 이 모든 제도를 강제 규정화하겠다는 것이다.

 

10년 전 소버린 사태는 당시 SK의 취약한 지배구조에 기인했다. 비록 1조원에 달하는 수업료를 냈지만 소버린 덕분에 SK의 지배구조가 더욱 탄탄해지고, 많은 주식 투자자들도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외국계 투기자본이 어떻게 우리 시장을 유린했는지 생생히 보여줬다.

 

챈들러 브러더스는 '오리엔탈 글로벌'(리처드), '레가텀'(크리스토퍼)이라는 회사를 각각 세워 소버린을 50대 50으로 나눴다. 최근 챈들러 일가는 소버린의 명백을 잇는 챈들러 코퍼레이션을 새로 만들어 필리핀 의료 사업 등에 활발히 투자하고 있다.  달콤한 SK의 추억을 가진 챈들러 형제가 언제 다시 한국을 찾을 지 모른다.

 

[챈들러 형제가 만든 '챈들러 코퍼레이션' 홈페이지 중 우리의 역사(Our History)에 "소버린은 2002년 한국의 3대 재벌인 SK에 투자했다"고 적시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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