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화학 부문의 부진에 칼을 빼들었다. 이훈기 롯데 화학군 총괄사장을 비롯해 화학군 CEO 13명 중 10명이 옷을 벗었다. 이밖에도 호텔롯데, 롯데면세점 등 부진 계열사 대표들도 짐을 싸면서 총 21명의 CEO가 교체됐다. 신 회장의 아들인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은 부사장으로 승진하며 경영 전면에 나선다.
확실한 필벌
롯데그룹은 28일 롯데지주를 포함한 37개 계열사의 이사회를 열고 2025년 정기 임원인사를 단행했다. 올해 롯데그룹의 인사 기조는 '필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룹의 핵심인 화학군의 부진이 이어지면서 그룹 유동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지라시'였지만 롯데그룹이 대우그룹처럼 해체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룹은 이례적으로 지라시에 대해 조회 공시까지 했다. 인사 전부터 '칼바람'이 예고됐다.
실제로 롯데는 이번 인사에서 전체 CEO의 36%인 21명을 교체했다. 이와 함께 22%의 임원을 퇴임시키면서 전체 임원 규모도 전년 대비 13% 줄었다. 고강도 쇄신을 통해 경영 체질을 본질적으로 혁신하고 구조조정을 가속화하겠다는 신동빈 회장의 의지가 담겼다.
특히 화학군의 변화가 컸다. 경영혁신실장을 거쳐 지난해 인사에서 화학군 총괄로 올라섰던 이훈기 사장이 옷을 벗었다. 이 자리는 롯데케미칼 첨단소재 부문을 맡고 있던 이영준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하며 채운다. 이 사장은 1991년 삼성종합화학에 입사 후 제일모직 케미칼 연구소장, 삼성SDI PC사업부장을 거쳐 2016년 롯데그룹에 합류한 '경력직'이다. 이 사장은 기초소재 대표도 겸임하며 롯데 화학군을 고부가가치 스페셜티 중심 사업구조로 신속하게 전환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할 계획이다.
롯데 화학군은 총 13명의 CEO 중 지난해 선임된 롯데알미늄·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LC USA를 제외한 10명이 교체된다. 롯데 화학군HQ CTO(기술전략본부장) 황민재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해 롯데케미칼 첨단소재 대표이사로, 롯데이네오스화학 대표이사 정승원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해 롯데정밀화학 대표이사로 기용된다. 임원진 역시 약 30%에 달하는 임원들이 퇴임, 세대교체를 이룬다. 특히 60대 이상 임원의 80%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
롯데지주에서는 노준형 경영혁신실장이 사장으로 승진한다. 또 경영혁신실과 사업지원실을 통합해 그룹사 비즈니스 구조조정과 혁신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한다. 신규 조직은 노 사장을 중심으로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강화해 각 계열사 혁신을 가속화할 계획이다. 노 사장은 전략·기획·신사업 전문가로 작년부터 롯데지주 경영혁신실장으로 재임 중이다.
젊은 롯데, 잠 깨어 오라
이번 롯데그룹 인사엔 또 하나의 테마가 있다. '젊은 롯데'다. 신 회장의 아들인 1986년생 신유열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하며 경영 전면에 나섰다. 동시에 60대 이상 임원들이 대거 옷을 벗었다. 이와 함께 70년대생 CEO 12명을 선임했다. 신 부사장과 손발을 맞출 젊은 피를 수혈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은 이번 인사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과 롯데바이오로직스 글로벌전략실장을 겸임한 신 부사장은 국내외 신사업 및 신기술 기회 발굴과 글로벌 협업 프로젝트 추진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해왔다.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신사업과 글로벌사업을 진두지휘할 계획이다. 바이오CDMO 등 신사업의 성공적 안착과 핵심사업의 글로벌 시장 개척을 본격적으로 주도하면서 그룹이 지속가능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젊은 CEO도 대거 발굴했다. 1970년생인 김동하 롯데면세점 대표·김경엽 롯데이노베이트 대표·박경선 롯데엠시시 대표·장선표 LC Titan 대표를 비롯해 1971년생인 황민재 롯데케미칼 첨단소재 대표, 1974년생인 최우제 에프알엘코리아 대표 등 이번 인사에서만 12명의 70년대생 대표가 선임됐다.
젊은 피가 수혈된 만큼 60대 이상의 고령 임원들은 대거 물러났다. 60대 대표이사 8명, 60대 임원의 절반 이상이 퇴임했다. 전체 임원 축소폭은 13%로 코로나19로 임원 규모를 대폭 줄였던 2021년보다 큰 폭으로 임원 수를 줄였다.
호텔과 유통의 엇갈린 운명
부진한 실적을 이어가고 있는 호텔롯데도 법인내 3개 사업부(롯데호텔·롯데면세점·롯데월드) 전부 대표가 물러나는 초강수를 뒀다. 호텔롯데 대표로는 롯데지주 사업지원실장 정호석 부사장이 내정됐다. 정 부사장은 롯데 그룹사의 전략 수립을 지원하고 경영 리스크를 관리해온 경영 전문가다.
정 부사장은 1991년 롯데기공(현 롯데알미늄)에 입사한 뒤 롯데 정책본부 운영실, 롯데물산 기획개발부문장, 롯데지주 REVA(부동산 관리)팀장을 역임했다. 2022년부터 롯데지주 사업지원실을 이끌며 롯데그룹의 수익성 중심 경영을 추진해왔다. 호텔롯데에서는 호텔의 글로벌 사업 확장을 가속화하는 동시에 위탁 운영 전략 본격화를 통해 리스크를 관리해 나갈 계획이다.
롯데면세점은 롯데지주 HR혁신실 기업문화팀장 김동하 상무가 전무로 승진해 신임 대표이사로, 롯데월드는 권오상 신규사업본부장 전무가 신임 대표이사로 내정됐다.
김동하 전무는 1997년 롯데제과 입사 후 롯데 정책본부 개선실, 롯데슈퍼 전략혁신부문장 등을 역임했다. 2022년부터 롯데지주 기업문화팀장으로서 그룹 노무와 생산성 관리를 책임졌다. 김 전무는 유통업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올해 6월 비상경영체제를 선포한 롯데면세점의 사업과 조직을 강하게 개혁할 적임자로 평가받는다.
권오상 전무는 1994년 롯데백화점 입사 뒤 2013년부터 12년간 롯데월드의 전략·신사업·마케팅·개발 등을 책임져온 테마파크 전문가다. 최근에는 롯데월드의 글로벌 사업 확장을 위해 베트남과 동남아 현지에 맞는 비즈니스 모델을 직접 기획, 추진해왔다.
폭풍이 불어닥친 화학·호텔과 달리 롯데지주 이동우 부회장을 비롯해 롯데 식품군 총괄대표 이영구 부회장, 롯데 유통군 총괄대표 김상현 부회장 및 식품·유통 계열사의 CEO는 유임된다. 화학군의 전면 개편이 이뤄지는 동안 그룹의 나머지 한 축인 유통·식품군이 안정적으로 버텨줘야 한다는 계산에서다.
한편 롯데는 글로벌 경쟁력을 보유한 외부 전문가 영입 기조를 유지하기로 했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12월 11일 부로 글로벌 바이오 전문가를 새로운 대표로 영입할 계획이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지난해 7월 인천송도국제도시 바이오 캠퍼스 1공장을 착공했으며, 2027년 상업생산을 목표로 착실히 사업을 진행 중이다.
롯데그룹은 신임 대표가 바이오CDMO 전문성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사업 역량을 키우고 의약품 수주 확대를 주도해 롯데 바이오 사업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글로벌 경영 불확실성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사업의 속도감과 실행력을 높이기 위해 연말 정기적으로 단행해온 정기 임원인사 체제에서 수시 임원인사 체제로 전환한다"며 "성과 기반 적시·수시 임원 영입과 교체를 통해 경영 환경을 극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