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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가 '델리(즉석조리식품)' 분야에서의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기 위한 시도가 한창이다. 목표 판매가에 맞춰 상품을 개발하는 '역(逆)기획' 전략을 활용해서다. 최근 '푸드플레이션(음식+인플레이션)'으로 외식과 장바구니 물가에 대한 부담이 커지고 있는 만큼 가성비를 추구하는 소비자들을 잡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델리 격전
이랜드는 오는 20일 NC송파점 내 킴스클럽에 '델리 바이 애슐리' 9호점을 오픈한다. 지난해 3월 1호점(강남점)을 선보인 이후 1~2개월마다 출점을 단행하고 있다. 올해는 송파점을 시작으로 연내 9개 매장을 추가로 개점해 몸집을 키우겠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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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바이 애슐리는 이랜드의 레스토랑 뷔페인 '애슐리퀸즈' 대표 메뉴를 델리 형태로 선보이는 브랜드다. 킴스클럽 매장 내에 마련된 델리 코너를 통해 180여 종의 메뉴를 판매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센트럴 키친(CK)에서 만들어 각 지점으로 납품되는 방식이 아닌 애슐리 셰프가 매장에서 직접 조리해 인기를 얻고 있다.
아직 입점된 지점은 8개에 불과하지만, 성장 속도는 가파르다. 이날 기준 델리의 누적 판매량은 400만개를 훌쩍 넘겼다. 론칭 이후 11개월 만의 성과다. '전품목 3990원 균일가'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킴스클럽은 델리로만 약 160억원의 매출을 거둬들인 셈이다. 이랜드에 따르면 킴스클럽에 방문하는 고객 10명 중 4명 이상이 델리를 구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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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가 델리 바이 애슐리의 출점에 속도를 내는 것은 치열해지는 시장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기 위해서다. 대형마트는 현재 대부분 공산품 수요를 이커머스에 뺏긴 상태다. 이에 따라 이들 업체는 오프라인 차별화를 꾀하기 위해 이커머스가 구현해내기 어려운 델리를 무기로 삼고 있다. 온라인 구매가 일상처럼 자리 잡은 공산품에 비해 신선식품은 이커머스의 침투율이 낮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해서다.
델리 분야의 향후 전망도 밝다. 1~2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고, 먹거리 물가가 치솟고 있어 외식은 물론 집밥 재료를 구입하는 데도 부담이 커지고 있다. 간편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제품을 선호하는 4050세대부터 트렌드에 민감한 2030세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아우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차별 없인 어려워
델리 시장이 커지면서 대형마트마다 뚜렷한 차별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델리 코너를 매장 안쪽에서 입구로 옮겨 전면 배치하는 전략은 이미 대부분의 대형마트에서 사용하는 전략이다. 일례로 롯데마트가 지난달 출점한 천호점은 매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고객이 27m의 '롱 델리 로드'를 걸을 수 있도록 꾸렸다. 롯데마트는 이곳에서 총 60개의 즉석조리식품을 3000~4000원대에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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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이랜드는 균일한 가격과 압도적인 메뉴의 가짓수를 델리 바이 애슐리만의 차별화로 택했다. 그간 애슐리퀸즈를 운영하며 외식 전문성을 키워온 덕분에 음식의 퀄리티만큼은 자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특히 눈에 띄는 건 다이소와 마찬가지로 '균일가 정책'을 푸드에 적용한 점이다. 유통업체들은 상품 가격을 결정할 때 매입 원가에 특정 비율의 마진을 붙이는 게 일반적이다. 원가와 마진율 차이에 따라 판매가가 천차만별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랜드는 이런 유통업계의 가격 설계 방식을 역순으로 바꿨다. 맨 처음 정한 목표 판매가에 원가와 마진율을 맞추는 식이다. 이를 위해 소싱전문 법인인 이랜드팜앤푸드를 활용했다. 이랜드팜앤푸드는 산지 농가와의 직거래를 통해 그룹 내 마트, 외식, 호텔 등에서 사용하는 자재를 통합 구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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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국내 소매점에서 판매되는 농산물은 '산지→선별장→도매시장→경매→중도매인→마트→소비자'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랜드는 중간 유통 단계를 제거해 '산지→선별장→이랜드→소비자'로 줄였다.
전 메뉴를 3990원에 판매하기로 한 이유도 있다. 고객이 가격표를 직관적으로 봤을 때 고민없이 고를 수 있는 심리적 마지노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신에 복수구매를 유도해 이윤을 보완하고자 메뉴를 대폭 늘렸다. 덕분에 델리 바이 애슐리가 저렴한 가격은 물론 품질까지 챙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랜드는 올해 직운영을 통해 유통 비용과 수수료 절감에 더욱 힘쓰겠다는 입장이다. 현재 이랜드는 가축(돈육)을 사육하고 있다. 최근에는 10만평 규모의 제주도 밭을 사들여 감귤을 직접 재배해 식자재에 사용하기도 했다.
이랜드 관계자는 "역기획의 핵심은 낮은 가격을 일시적인 게 아니라 지속가능한 구조로 만들어 상시할인가격(EDLP)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제품 원가를 설계한다는 데 있다"며 "A급 상품을 절반 가격에 제공해 소비자에게 2배의 가치를 제공하겠다는 자사의 철학이 고물가 시대와 맞물리면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