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럼 기획 안을 이번 주까지 보내주시고요, 기대하겠습니다."
"네, 이번 금요일까지요. 잘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먼 길 가셔야겠네요."
"네에? 아…… 예."
`먼 길? 왠 먼 길?` 박상무의 뜬금없는 인사말에 잠시 당황하는 윤부장. 이내 박상무가 미팅 내내 간간이 휴대폰을 확인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 인사를 나누며 사무실이 10분 거리라며 반가와해 놓고는 한 시간 만에 착각을 한 모양이다. 종종 있는 일이다. 비즈니스 미팅을 하다가 같은 질문을 두 세 번 하는 사람도 적지 않고, 명함을 받고 십 분이 되기도 전에 거침 없이 성을 바꿔 부르기도 한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많은, 정신 없는 현대 사회에서 이해하고 넘어갈 수 밖에 없다, 물론 썩 기분이 좋은 건 아니지만.
"부장님, H상사에서 전화 왔었습니다. 담당자가 바뀌었다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아, 맞다, 김 지연, 김지연씨 랍니다."
함께 일한 지 5년이 다 되어가는 정대리가 또 깜박거린다. 유난히 다른 사람의 성을 기억하지 못한다. 들었는데, 들었는데 하면서 오 분 이상 머리를 갸웃거리기 일쑤다. 통화하면서 메모하라고 수 차례 이야기해도 고쳐지지 않는다. 하긴, 몸에 밴 습관이 그리 쉽게 고쳐지겠는가?
"안녕하십니까? 전 윤정수 부장입니다. 김지연님 부탁 드립니다."
"예, 윤부장님. 반갑습니다. 전화로 먼저 인사 드리네요. 그런데 저는 강지연입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이거, 초면에 실수로 어설픈 인상부터 드리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수화기 건너편에서 까르르 웃음 소리가 들린다. 어물쩍 양해를 구하고 넘어갔지만 윤부장은 자기도 모르게 정대리를 향해 꼿꼿한 눈길을 보내게 된다. 어디 가도 예의만큼은 빠지지 않는 자신을 실없이 결례하게 만든 정대리가 오늘따라 더 밉살스럽다. 만일 정대리가 진급을 못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사람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서 일 것이다. 비즈니스에 있어 이름 기억이야말로 기본 중에 기본인 것을.
"저녁은요?"
현관을 들어서는 윤부장에게 변함없이 연속극 삼매경에 빠져있는 아내가 묻는다.
"일이 늦어서 아직 못 먹었어."
씻고 나온 윤부장에게 아내가 생뚱 맞게 홍삼 차를 내민다.
"밥은?"
"안 드셨어요? 일이 늦어서 드셨다면서요?" 아내의 눈길은 여전히 TV에 꽂혀있다. 표정까지 주인공과 비슷하다. 그렇지, 아예 드라마 속에 들어가 있는데 어떻게 말이 제대로 들리겠냐고?
윤부장은 곰곰히 생각 해 본다. 금방 했던 말을 잊어버리고 엉뚱한 질문을 했던 고객사 상무부터, 깜빡이 정대리 그리고 연속극 무아지경에 빠진 아내까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엉뚱하게 듣기 일쑤인 이유는 과연 무얼까?
문득 윤부장은 선택적 듣기라는 말이 떠올랐다. 듣고 싶은 소리만 듣고 나머지는 무시해버리는 일종의 자기보호 현상. 어딜 가나 소리가 들리는 요란한 현대사회를 견디려다 보니 우리는 필요한 소리까지 무시하거나, 듣다가 마는, 듣기 둔감 증 환자가 되어버린 게 아닐까?
열심히 말을 하는데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세상.
윤부장은 오늘 아침 신문에서 보았던 기사가 떠올랐다. - 일본에서 성업 중이라는 `남의 말 잘 들어주는 클럽` - 10분당 1천엔을 받고 전화로 불평을 들어주는데 평균 70~80분 가량 상담을 하며, 고객의 80%가 재 구매자.
`한국에는 어디 그런 클럽 없을까?` 윤부장은 누군가 내 말을 정성껏 귀 기울여 들어준다면 하루 종일 벽에 부딪친 듯한 이 지친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