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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말 한 마디

  • 2013.12.27(금) 12:30

“뭔가 이상해. 수상한 데가 있어.”
“무슨 일 있으세요? 아침부터 계속 안절부절이세요.”
점심 시간 내내 커피 잔을 들고 중얼거리는 김과장.
“생전 그런 말 안 하는 사람이. 글쎄, 오늘 출근길에 나더러 예쁘다잖아. 그 나이 또래치고는 젊어 보인다나 어떻다나.”
“좋은 얘기인데 뭘 그러세요? 공연히 자랑하시는 거구나.”
노처녀 박대리의 부러움 섞인 반응에 김과장과 동기인, 결혼 십 일년 차 나대리가 대뜸 끼어든다.
“맞아, 수상한 냄새가 나네. 그 말 하기 전엔 무슨 말 했어? 혹시 요즘 부쩍 늦게 들어오지 않아? 그거, 남자들이 뭔가 켕길 때 잘 쓰는 표현이거든?”
“그치? 이상하지? 늦지는 않는데? …… 애 아빠 얼마 전에 건강검진 받았는데…… 혹시 어디 이상 생긴 건 아니겠지?”
이뻐보인다는 말이 그렇게 신경 쓰이나? 박대리는 결혼 생활에 심하게 노련해져 부정적인 방향으로 예민하게 돌아가는 아줌마들의 레이더가 피곤해서 슬그머니 탕비실을 빠져 나왔다.

모처럼 여고 동창회에 나간 박대리. 늦깎이 학업으로 결혼시기를 놓쳐버린 그를 빼고는 하나 같이 애 엄마에 주부 칠∙팔 단들이다. 처음엔 여고시절로 출발하지만 한 두 시간 지나면 친구 남편 술버릇이며 잠버릇까지 다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자기 이야기에 열심이다. 박대리는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절대로 기죽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을 다 꿰고 있는 듯 달관한 아줌마 동창들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부부 간에 금슬이 좋으려면?”
“글쎄…… 아침 밥을 꼬박꼬박 해준다? 바가지를 긁지 않는다?”
“아이고, 너 아직 멀었다. 시집 가려면 몇 년 더 걸리겠다” 동창들이 까르르 웃는다.
“아니야? 그럼 뭔데?”
“순진한 애 그만 놀리고 가르쳐주자.”
“부부 간에 정말 잘 지내려면…… 간단해. 대화를 안 하면 돼.”
“그럼, 그럼. 최고지. 괜히 이말 저 말 섞다가 짜증내고 언성 높아지고. 뭐 하러 그런 짓 하니?”
“어지간하면 대충 넘어 가. 쿨하게. 꼭 필요한 얘기만 해. 돈 얘기 같은 거. 대화를 안 할수록 집안이 평화로워져. 대화를 안 해야 우아하게 살 수 있다니까.”
박대리는 문득 오전 내내 좌불안석이던 김과장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의 막연한 불안감은 쿨 함에 익숙해져 낯설게 느껴지는 `따뜻한 말 한 마디` 때문 아니었을까? 부딪치는 게 두려워 입을 닫는다면, 귀찮고 번거로워서 말하기를 꺼린다면 우리는 누구와 더불어 살 수 있을까?

며칠 전 발표 된 한 조사에 의하면 부부 세 쌍 중 한 쌍은 하루 평균 30분의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고 한다. 결혼 기간이 길수록 대화 시간은 짧아지고 대화의 주제도 자녀 교육이나 건강이 주를 이룬다. 물론 애정 표현과 칭찬에도 인색하다. `사랑한다` `예쁘다` `멋있다` 같은 칭찬과 격려의 말은 절반 이상이 "가끔 기분이 좋을 때" 에나 하고 그 나마 50~60대 중년은 거의 하지 않는단다.

박대리는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따뜻한 말 한 마디` 라는 드라마를 켰다. 등장인물 모두가 어디서 본 듯 하다. 일상이 곧 친근함이요 그것이 평화라는 오해의 덫에 사로잡혀, 정작 가까운 이에게 속을 털어 놓고 채널을 맞추는 `최소한의 따뜻함` 조차 챙기지 못하는 우리들. 바로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낯섦과 친근함은 극명하게 다르지만 언제라도 뒤바뀔 수 있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낯선 사람이 따뜻한 말 한마디로 단짝 친구가 되고, 더 없이 가까운 이라도 쿨한 상태가 계속되면 절벽 같은 거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박대리는 내일 주변의 소중한 이들에게 따뜻한 문자를 한 자락 보내기로 결심한다. 외롭지 않은 송년에 따뜻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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