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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홍원식 회장이 흘린 눈물의 의미

  • 2021.05.04(화) 16:02

'불가리스 사태'에 회장직‧세습 포기…'눈물의 사과'
의심의 시선 여전…실제 쇄신으로 이어져야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4일 밝혔다. /사진=이현석 기자 tryon@

"2013년 회사의 대리점 밀어내기(강매) 사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제 외조카 황하나 사건, 지난해 발생한 온라인 댓글 논란 등이 생겼을 때 회장으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과드리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했는데 부족했습니다. 이 모든 것에 책임을 지고자 회장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도 않겠습니다. '불가리스 사태' 수습을 하느라 이러한 결심을 하는 것이 늦어져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이 자리를 내려놨다. 사상 최초로 공개석상에 나섰다. 카메라 앞에서 사과문을 낭독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정이 북받친 듯 눈물을 떨궜다. 준비한 입장문마저 완전히 낭독하지 못했다. 몸을 떨며 허리를 굽혔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민간 유가공 기업을 이끌어 온 경영인이라기엔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었다.

홍 회장의 사퇴 원인은 불가리스 사태다. 남양유업은 지난 달13일 한국의과학연구원과 함께 주최한 세미나 자리에서 세포 실험 결과 불가리스가 코로나19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발표했다. 발표 내용은 단숨에 화제가 됐다. 전국에서 불가리스가 품절됐다. 남양유업의 주가도 폭등했다.

이는 반나절 천하로 끝났다. 질병관리청은 다음날 남양유업의 발표에 신뢰성이 낮다고 반박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남양유업을 식품표시광고법 위반으로 경찰에 고발했다. 세종시는 남양유업 상품 생산의 40%를 책임지는 세종공장에 영업정지 처분을 내렸다. 불매운동은 다시 한 번 격해졌다. 위기를 느낀 홍 회장이 직접 나섰다.

이때까지도 남양유업은 과거 사과의 방식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 탓에 사태를 키웠다. 남양유업은 2013년 대리점 밀어내기 사건, 2019년 황하나 마약 투약 사건, 2020년 경쟁사 허위비방 사건 등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사과보다는 '사실'을 앞세워 해명하려는 모습을 보여 왔다.

2013년 대리점 밀어내기 사건에 대한 남양유업의 첫 번째 입장은 "일부 직원의 과거 일탈이었으며, 해당 직원의 사표를 수리했다"였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서야 대표이사가 나서 사과했다. 2020년 경쟁사 허위비방 사건 때도 비슷한 방식의 사과가 반복됐다. 남양유업은 사과문에서 "경쟁사 공장 4㎞ 인근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며, 실무자가 이를 활용해 자의적으로 업무를 진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불가리스 사태 수습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가리스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자 남양유업은 "세포 실험에서 바이러스 억제 효과가 나타난 것은 명확한 사실이지만, 소비자 오해를 불러일으킨 점에 대해서는 사과한다"를 골자로 한 사과문을 발표했다. 행사를 기획한 자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알 수 없다고 답했다. 이에 실무자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홍 회장 등 기업 상층부를 겨냥한 비판이 업계 내·외에서 쏟아졌다.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이 최근 자사 유제품 불가리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억제 효과가 있다는 발표로 빚어진 논란과 관련해 4일 오전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남양유업 본사 대강당에서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고 있다. /이명근 기자 qwe123@

이런 남양유업의 사과 방식은 조롱의 대상이 됐다. 사과의 기본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일었다. 사과에는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히 적시돼야 한다. 사죄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과 의지가 담겨야 함은 당연하다.

사과를 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거나, 마음이 아픔을 강조하는 것은 금기사항으로 꼽힌다. 남양유업은 여태까지의 논란 수습 과정에서 대부분 자신들을 변호하는 것을 사과보다 우선시했다. 결국 홍 회장의 퇴진은 여태까지 남양이 운영해 온 '사과 프로세스'의 결과인 셈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 홍 회장이 전달한 메시지는 과거 남양유업의 사과문과는 달랐다. 그는 과거 논란이 됐던 사건 하나하나를 직접 이야기했다. 회장으로서 이를 챙기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시인했다.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자녀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겠다며 개선의 의지도 강조했다. 구성만 보면 완벽한 사과문이다.

하지만 의문도 남겼다. 홍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면서도 지분 처분에 대한 계획을 밝히지는 않았다. 남양유업의 총수 일가 지분은 53.85%에 달한다. 불가리스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폐쇄적 조직 문화에 대한 혁신안도 사과문에 담지 않았다. 가장 큰 피해자인 대리점주의 피해 구제나 재발 방지책 마련에 대한 내용도 빠졌다. '눈물 속 퇴진'이라는 그럴듯한 그림으로 핵심을 비켜나가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남은 것은 실천이다. 홍 회장은 오늘의 사과가 진심이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전문경영인을 선임하고 조직을 혁신해야 한다. 대리점주와의 상생 행보에도 진정성을 담아야 한다. 남양유업이 지금까지와 비슷한 방식의 논란에 휘말리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몇 년 후 슬그머니 경영에 복귀하는 추태를 보여서도 안된다.

1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논란에 침묵으로 일관해 오던 70대 노(老)경영인의 눈물은 전국민에게 생중계됐다. 울먹이며 사과문을 끝까지 낭독하지 못하는 모습에 이번만은 다를 것이라며 믿음을 주는 소비자가 있을 지도 모른다. 남양유업이 또 다시 과거와 비슷한 행태를 보인다면 이들이 느낄 배신감은 더욱 클 것이다. 후폭풍은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홍 회장이 이날 흘린 눈물의 의미가 '참회'였음을 행동으로 증명해 나가는 모습을 기대한다. 앞으로 홍 회장이 하게 될 선택에 남양유업의 미래가 결정된다. 1500명 남양유업 임직원들의 미래도 달려 있다. "모든 잘못은 저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저의 사퇴를 계기로 남양유업 임직원에 대한 싸늘한 시선을 거둬달라"는 홍 회장의 호소가 진심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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