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빵 전성기
제가 어릴 때 빵은 간식이었습니다. 달콤한 초코 소라빵이나 케첩에 버무린 샐러드를 잔뜩 넣은 튀김빵이 '최애'였죠. 어린 몸에 빵을 한 세개쯤 먹으면 배가 엄청나게 부르게 마련인데, 그래도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은 늘 똑같았습니다. "빵이 밥이 되니?". 한국인은 밥을 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30년쯤 지나니 빵은 식사가 아니라 간식이라는 말이 우스워졌습니다. 유명한 빵집마다 줄을 길게 늘어선 걸 보면 요즘 사람들은 밥보다 빵을 더 많이 먹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예전엔 일본 여행을 가면 편의점 빵도 그렇게 맛있다며 빵 투어를 다녔는데, 이제는 일본인들이 한국에 와서 유명 빵집을 순례합니다.
빵이 식사의 위치로 올라오면서 인기있는 빵의 종류도 다양해졌습니다. 이전까지는 달콤한 초코나 생크림 등을 넣은 간식빵이 주류였다면 이제는 서양에서 흔히 식사로 먹는 바게트, 캄파뉴 등 이른바 '식사빵'도 일상의 영역으로 들어왔습니다. 기존의 '달콤한 빵'이 높은 당 함유량과 칼로리 등으로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인식이 퍼진 것도 한 몫 했죠.
최근엔 정제 탄수화물의 유해성이 알려지며 도정하지 않은 '통밀'을 이용한 빵도 인기입니다. 식감은 다소 거칠지만 혈당을 많이 올리지 않고 소화가 느려 다이어트에도 좋다고 합니다. 다이어트의 최대 난관 중 하나가 바로 빵일텐데, 빵을 먹어도 다이어트가 된다 하니 인기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통밀 식빵을 먹어보니 맛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바꾸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어쩐지 맛있더라
그런데 이 '맛있는 통밀 식빵'에는 비밀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통밀 식빵이라고 하면 어떤 빵을 생각할까요. 하얀 정제 밀가루를 사용하지 않고 통밀로만 만든 빵을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통밀 식빵 중 정제 밀가루를 사용하지 않고 통밀만 쓴 제품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대부분은 정제 밀가루 비중이 월등히 높습니다.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인기 통밀 식빵 10여 개를 조사해 본 결과 통밀 함량이 전체 중량의 10%를 넘는 건 4개 제품에 불과했습니다. 이 중 정제 밀가루보다 통밀 함량이 더 높은 건 2개 제품뿐이었고 100% 통밀만 사용한 제품은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지난 4월 매일유업이 인수해 화제가 됐던 베이커리 '밀도'의 통밀식빵은 통밀 함량이 8.38%에 불과했고요. 밀도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 '도제식빵'의 통밀식빵은 통밀이 6.4%밖에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통밀은 거들 뿐'이라는 말이 하고싶어지는 함량입니다. 쿠팡의 PB인 '곰곰 통밀식빵'은 5.2%구요. 통밀 함량을 높인 '곰곰 통밀가득식빵'은 8.5%입니다. 일반적으로 식빵을 만들 때 밀가루의 비중이 50~60%라는 점을 고려하면 전체 밀가루 중 통밀 비중이 20~30%정도 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조사 대상 제품 중 통밀 함량이 가장 낮았던 건 SPC삼립의 양산형 식빵 '토종효모로 만든 통밀식빵'입니다. 통밀 함량이 2.39%밖에 안 됩니다. 이정도면 하얀 밀가루 위에 통밀가루를 한 줌 뿌린 수준입니다. 같은 회사의 '로만밀 통밀식빵'은 통밀 함량이 8.89%로 그나마 높은 편입니다.
다만 같은 SPC라고 해도 베이커리 전문 브랜드인 파리바게뜨에서 판매하는 '고식이섬유 1㎝ 통밀식빵'은 통밀 함량이 32.16%로 상당히 높았습니다. 통밀과 정제 밀가루를 6대 4로 섞었다고 합니다. 경쟁사인 CJ푸드빌 뚜레쥬르의 경우 자사 통밀 식빵의 통밀 함량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고민의 결과물?
사실 베이커리들이 100% 통밀 식빵을 만들지 않는 건 단순히 원가 절감때문만은 아닙니다. 식빵에서 소비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식감'입니다. 딱딱하고 질긴 바게트나 캄파뉴, 베이글 등 다른 식사빵과 달리 식빵은 부드럽고 촉촉한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그런데 도정을 하지 않은 통밀을 사용하면 이 촉촉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사라집니다. 마치 식사빵처럼 뻣뻣하고 질긴 빵이 되죠. 우리가 식빵을 구매할 때 기대하는 맛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통밀의 맛과 향을 어느 정도 내면서도 '식빵'이라는 이름에 기대하는 촉촉함까지 잡기 위해 블렌딩을 한다는 설명입니다.
SPC 관계자는 "통밀을 많이 넣을수록 식감이 뻑뻑해지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취향에 따라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함유량을 가진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며 "100% 통밀로 제품을 만들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될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소비자의 기호에는 맞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같은 브랜드의 통밀빵이라고 해도 식빵이 아닌 모닝롤이나 캄파뉴 형태의 제품들은 통밀 함량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SPC삼립의 경우에도 로만밀 식빵의 통밀 함량이 8%대인 데 비해 로만밀 모닝롤은 18%로 크게 높아집니다. 통밀을 5%밖에 넣지 않았던 쿠팡의 곰곰도 식빵이 아닌 그냥 '통밀빵'에는 밀가루와 통밀을 각각 29.7%씩 넣었습니다.
이쯤되면 무작정 베이커리의 상술을 탓하기보다는 내가 먹는 용도에 맞는 빵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식빵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건강한 제품을 원한다면 통밀을 섞은 식빵을 고르고, 맛보다는 건강이 중요하다면 식빵이 아닌 다른 '통밀빵'을 골라야겠죠.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은, 빵 시장에서도 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