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인공지능)의 발전은 반도체 시장에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반도체집적회로의 성능이 24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은 AI 반도체 시장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분위기다. 누군가는 외면했던 값비싼 HBM(고대역폭메모리)은 이례적으로 시장의 대세가 됐다. 이에 반도체 업계에서는 '넥스트 HBM' 기술을 선점하기 위한 움직임이 한창이다. 차세대 기술을 우선 확보해 예측하기 어려운 AI 시장에 빠르게 대응하고, 수위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이다. HBM 열풍을 이을 미래 대세 기술을 앞서 살펴본다.[편집자]
최근 반도체 업계에서는 D램에 이어 낸드플래시까지 'AI 수혜주'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D램과 낸드플래시는 모두 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 반도체지만 쓰임새가 다르다. D램이 주 메모리로 사용된다면, 낸드는 보조저장장치다. 속도는 빠르지만 전원이 꺼지면 데이터가 사라지는 D램에 비해, 낸드는 속도는 느리지만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사라지지 않는 게 특징이다.
낸드 중에서도 SSD(대용량저장장치)는 AI의 발달에 따라 데이터 저장·처리량이 많아짐에 따라 수요가 증가한 제품 중 하나다. 기업이 AI 확산의 토대가 되는 데이터센터 투자를 늘리자 기업용으로 사용하는 SSD의 수요도 급증한 것이다. 실제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업용 SSD(eSSD) 시장 매출 규모는 37억5810만 달러(약 4조9900억원)에 달했다. 이는 전 분기 23억660만 달러(약 3조700억원) 대비 62.9% 급증한 수준이다.
QLC가 뭐길래
특히 최근 eSSD 시장에서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TLC(트리플레벨셀)에서 QLC(쿼드레벨셀)로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낸드는 데이터 저장 방식에 따라 △SLC(싱글레벨셀) △MLC(멀티레벨셀) △TLC △QLC 방식으로 나뉜다. 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정보가 저장되는 가장 작은 단위인 셀(Cell)에 몇 비트(bit)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느냐다.
셀은 컨트롤 게이트(Control Gate), 플로팅 게이트(Floating Gate) 등으로 이뤄져 있다. 컨트롤 게이트에 전압을 가하면 통로를 이동하던 전자가 플로팅 게이트에 저장되는 방식이다. 낸드는 이곳에 쌓인 전자를 통해 셀을 0 또는 1의 상태로 구분해 정보를 저장한다. 이 상태는 셀에 들어 있는 전자 개수로 구분한다. 전자가 적으면 0, 많으면 1로 읽는 식이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데이터를 '사람', 셀을 '원룸'으로 비유해보자. 데이터를 저장하는 것은 셀이라는 원룸에 데이터라는 사람이 입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SLC는 하나의 데이터가 하나의 셀에 저장되는 방식이다. 원룸을 혼자 사용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월세 즉, 가격은 비싸지만 데이터 처리 속도는 가장 빠르다. 원룸에 거주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인원수를 파악하는 데 오래 걸리는 것처럼, 셀 안에 저장된 데이터의 양이 적기 때문에 속도가 빠른 것이다.
MLC는 원룸에 칸막이를 쳐 두 명의 사람이 거주하는 형태로 볼 수 있다. 하나의 셀에 00, 01, 10, 11 형태로 2개의 데이터가 저장된다. 하나의 방을 쪼갠 만큼 SLC보다는 저렴하지만 데이터 처리 속도는 SLC 대비 느리다.
TLC는 한 셀에 세 개의 데이터가, QLC는 한 셀에 네 개의 데이터가 저장되는 것을 말한다. TLC와 QLC는 많은 양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지만, 하나의 셀에 저장돼 있는 데이터가 많은 만큼 데이터 처리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리다.
이에 TLC와 QLC는 합리적인 가격에 대용량의 데이터를 저장하고 싶을 때 사용한다. 현재 IT 업계는 AI 환경에 맞게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기 위한 솔루션이 필요한 상황이다. 낸드도 TCL보다 용량이 큰 QLC로의 전환이 이뤄지는 이유다. 실제 구글, 메타, 아마존 등 글로벌 빅테크는 QLC 기반의 eSSD를 앞다퉈 찾는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올해부터는 QLC 낸드 기반의 제품 수요 증가가 두드러지는 추세다. 트렌드포스는 올해 QLC가 낸드 출하량의 20%를 차지하고, 이 비중은 내년에 대폭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AI 흐름 맞춰 진화하는 낸드
이러한 TLC, QLC 방식은 셀당 공간을 넓힌 3차원(3D) 구조와 접목해 최고의 시너지를 낸다. 성능·용량 개선을 위해 평면 구조(2D)인 낸드의 셀 크기를 작게, 간격은 좁게 만들면 데이터 간 간섭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인구 밀도를 늘리기 위해 한정된 땅에 좁은 간격으로 집을 짓게 되면 소음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에 반도체 제조사들은 낸드를 수직으로 쌓아올리는 '적층 기술'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가장 선도적으로 기술을 도입한 곳은 삼성전자다. 삼성전자는 2013년 단층으로 배열된 셀을 3차원 수직으로 적층해 기존 셀 간 간섭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했다. 평면이던 낸드를 높게 쌓아 직육면체(3D) 구조로 만들면, 웨이퍼 한 장에서 생산할 수 있는 전체 용량도 늘어난다.
삼성전자는 이를 'V낸드'로 명명하고 QLC 방식을 적용하는 등 기술을 지속 발전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1Tb(테라비트) QLC 9세대 V낸드'를 업계 최초로 양산했다. 지난 4월 TLC 기반 같은 낸드를 최초 양산한 지 약 4개월 만이다.
9세대 V낸드는 더블 스택 구조로, 두 번에 걸쳐 채널 홀을 나눠 뚫은 뒤 한 개의 칩으로 결합하는 방식이다. 셀을 높이 쌓아 올리면 전자가 수직으로 쌓여있는 셀 사이를 오르내릴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이 통로를 '채널 홀'이라고 하는데, 곧게 뚫기 위해서는 셀을 나누어 채널 홀을 뚫은 뒤 합치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때 셀을 나누지 않고 한 번에 뚫는 기술을 싱글 스택, 두 번에 나눠 뚫고 합치면 더블 스택이라고 부른다.
삼성전자는 여기에 몰드층을 순차적으로 적층한 다음 한 번에 전자가 이동하는 채널 홀을 만드는 '채널 홀 에칭(Channel Hole Etching)' 기술을 더해 업계 최고 단수를 구현해냈다고 설명한다. 업계에서는 V9의 적층 단수가 업계 최고인 290단 수준으로 추정하고 있다.
QLC 9세대 V낸드는 데이터센터용 고용량 SSD를 만드는 데 사용될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이를 시작으로 향후 모바일 UFS(유니버셜 플래시 스토리지), PC 등으로 제품 응용처를 점차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QLC 기반 낸드 제품 라인업도 늘린다. 올해 11월에는 업계 최고 용량의 eSSD인 128TB 모델 'BM1743'을 선보일 예정이다. BM1743은 7세대 QLC 낸드플래시를 활용해 만든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서 열린 '플래시 메모리 서밋(FMS)'에서 해당 제품의 개발 현황을 밝힌 바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 SK하이닉스에 수위를 뺏긴 만큼, SSD 시장에서는 영향력을 키워가겠다는 복안이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분기 기준 삼성전자의 낸드 시장 점유율은 36.9%로 1위다. 그 뒤를 이어 SK하이닉스는 eSSD 전문 자회사인 솔리다임을 포함해 22.1%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솔리다임을 통해 QLC 기반의 60TB 이상 eSSD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내년 초에는 128TB, 그리고 그 이후에는 256TB 제품도 선보이며 고용량 제품 리더십을 유지할 계획이다. 나아가 SK하이닉스 자체적으로도 낸드 제품 라인업 확대도 준비 중이다. 올해 QLC 기반 60TB 제품을 개발하고 내년에는 300TB 초고용량 제품도 준비해 대응하겠다는 복안이다.
허성회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플래시개발실 부사장은 "9세대 TLC 양산 4개월 만에 9세대 QLC V낸드 또한 양산에 성공함으로써 AI용 고성능, 고용량 SSD 시장이 요구하는 최신 라인업을 모두 갖췄다"며 "최근 AI향으로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기업용 SSD 시장에서의 리더십이 더욱 부각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