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고객이 맡긴 돈을 증권사가 알아서 굴려주는 '랩어카운트(Wrap Account·종합자산관리)' 시장이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몸집을 불려가고 있다.
라임과 옵티머스 등 잇따른 사고로 신뢰를 잃은 사모펀드 대신 고액자산가들을 중심으로 랩어카운트를 찾는 발길이 부쩍 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재확산에다 미국 대선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증시가 조정 받고 있다는 점도 랩어카운트 시장 부활에 불을 지피고 있다.
◇ 사모펀드 사태 이후 고액자산가들 관심 '업'
2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기준 일임형 랩어카운트의 총 잔고는 123조6868억원을 기록하며 2009년 관련 통계 집계를 시작한 이후 최대치를 경신했다. 코로나19 여파로 112조1172억원까지 쪼그라들었던 지난 4월 말과 비교하면 11조5000억원 넘게 늘어났다. 같은 기간 투자자문사의 자문을 받아 증권사가 운용하는 자문형 랩어카운트 계약자산도 1조117억원에서 1조2663억원으로 2500억원 남짓 증가했다.
흔히 줄여서 '랩'으로 부르는 랩어카운트는 증권사가 일정 수준의 수수료를 받고 고객이 맡긴 돈을 대신 굴려주는 종합자산관리 상품이다. 다수 투자자의 돈을 한데 모아 운용하는 펀드와 달리 개별 투자자들의 돈을 1대 1로 관리해 준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큰손'들이 많이 찾는 상품으로 알려졌다. 편입자산과 관련한 별다른 제약이 없어 시장 상황에 맞춰 주식과 채권을 비롯한 다양한 금융투자상품에 투자할 수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랩어카운트 시장은 2010년대 초반 자동차와 화학, 정유업종 등 이른바 '차화정' 투자 열풍을 타고 자문형 랩어카운트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최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후 특정 섹터와 테마에 대한 쏠림 현상이 완화되고 그 여파로 자문업계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한동안 투자자들에게 외면받았다.
그러나 최근 재테크 시장을 둘러싼 환경이 변화하면서 랩어카운트 시장으로 다시 투자자들이 모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모펀드 시장의 추락이다.
지난해 라임 펀드를 시작으로 최근 옵티머스 펀드까지 투자자들의 신뢰를 갉아먹는 대규모 사건사고가 잇따르면서 사모펀드의 인기는 눈에 띄게 떨어졌다. 실제 올 1~9월 사모펀드 시장으로 유입된 자금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6%가량 줄어든 13조6986억원에 그쳤다. 사모펀드에 실망한 자산가들이 주도적으로 랩어카운트에 가입하고 있다는 게 금융투자업계의 분석이다.
게다가 최근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코로나19 재확산과 미국 대선 불확실성 여파로 증시가 조정을 받으면서 투자자들이 스스로 재테크에 나서기보단 전문가들이 맞춤식으로 자산을 운용해 주는 랩어카운트에 돈을 맡기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 증권사들 '반색'…향후 전망 밝아
증권사들은 랩어카운트의 부활에 반색하고 있다. KB증권의 대표 일임형 랩어카운트인 'KB 에이블 어카운트'는 상품을 내놓은지 3년 3개월 만인 지난 9월 잔액 5조원을 돌파했고, NH투자증권의 랩어카운트 상품인 NH 크리에이터 어카운트 역시 얼마 전 출시 1주년을 맞아 자산 1200억원을 넘어섰다.
투자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국내외 주식과 채권은 물론, 리츠 등을 투자자산으로 활용한 신상품 출시도 잇따르고 있다. 증권사들이 통상 억 단위였던 최소 가입 기준을 1000만~3000만원 수준까지 확 낮춰 랩어카운트의 대중화를 꾀하는 것도 특징이다.
랩어카운트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는 KB증권은 회사 자체 모델 포트폴리오와 고객 맞춤 포트폴리오를 활용해 국내외 상장지수펀드(ETF)에 투자하는 'KB 에이블 어카운트 이지폴리오' 랩 서비스를 새롭게 선보였고 한국투자증권은 해외주식에 초점을 맞춘 '한국투자 Z세대 플렉스랩'을 내놨다. 대신증권은 국내 상장 리츠와 부동산 공모펀드 등에 투자해 배당수익을 노리는 '대신 밸런스 리츠펀드랩'을 출시했다.
현재 국내 자본시장의 주요 화두 중 하나인 '한국판 뉴딜'을 테마로 삼은 랩어카운트도 나왔다. '하나 고배당금융테크랩'과 '하나 고배당금융테크랩 V2' 등 이른바 '하나 금융테크랩' 시리즈로 고객몰이에 성공한 하나금융투자는 그 3번째 버전으로 '하나 뉴딜금융테크랩V3'를 출시했다. 한국판 뉴딜 정책과 관련성이 높은 국내 주식과 우량 금융주, 대형 기술주를 비롯해 관련 ETF에도 투자한다.
당분간 증시의 조정 가능성이 점쳐지는 상황에서 증권사들의 적극적인 마케팅과 맞물려 랩어카운트의 인기는 지속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관측된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일부 업종이나 종목에 대한 쏠림 현상이 심했던 과거 랩어카운트와 달리 현재 증권사들이 선보이는 상품들은 자산배분에 신경 쓰면서 위험도를 낮춘 것이 특징"이라며 "마땅한 투자처가 없는 상황에서 가입문턱이 낮아진 랩어카운트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