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계의 성폭력 파문이 계속되자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지난 15일 가해자 영구제명과 취업 차단, 성폭력 조사 외부 전문기관 위탁 등을 담은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이기흥 회장이 밝힌 성폭력 조사 외부기관 위탁 방안은 이미 대한체육회가 해온 내용입니다. 대한체육회는 2년마다 스포츠계의 (성)폭력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지난 8일에도 한남대학교 산학협력단에 의뢰한 '2018년 스포츠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대한체육회는 이 조사 결과를 언론에 알리는 보도자료에서 "스포츠계 (성)폭력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며 "대한체육회가 실시하는 스포츠인권교육의 확대가 (성)폭력 예방에 효과적인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습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의 노력으로 성폭력이 줄어들고 있다고 주장한 겁니다.
그러나 대한체육회가 이렇게 자화자찬을 한 날,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는 SBS 8시뉴스를 통해 조재범 전 코치에게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면서 대한체육회를 신뢰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대한체육회가 열흘 전 발표한 실태조사는 조달청 입찰을 통해 한남대학교 산학협력단이라는 외부기관을 선정, 무려 지난해 6월부터 11월까지 6개월간 조사를 진행한 것인데요. 그럼에도 대한체육회는 왜 성폭력이 줄어들고 있다고 발표한 것일까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 대한체육회가 가공한 보도자료가 아닌 당시 실태조사 결과보고서 원본을 찾아서 살펴봤습니다.
◇ 성폭력 피해 68명인데…피해자 수보다 비율만 강조
대한체육회는 한남대학교 산학협력단에 의뢰해 지난 8일 '2018년 스포츠 (성)폭력 실태조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해당 조사는 일반선수와 국가대표선수, 일반선수 지도자 및 국가대표선수 지도자, 학부모로 나눠 총 3044명에게 설문을 진행했는데요. 이중 2061명이 설문조사에 참여했으며 일반선수는 1069명, 국가대표선수는 631명이 응답했습니다.
성폭력 피해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국가대표선수 588명과 일반선수 1069명이 응답했는데요. 이에 따르면 국가대표선수 588명 중 10명, 일반선수 1069명 중 58명이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성폭력 피해 횟수로 보면 국가대표 선수는 응답자 10명이 13회, 일반선수는 응답자 58명이 117회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했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차례에 걸쳐 성폭력 피해를 당한 것입니다.
대한체육회는 이 조사 결과를 놓고 국가대표선수 1.7%, 일반선수 2.7%가 성폭력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으며, 이는 2016년(일반선수 3.0%)에 비해 줄어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요.
발표 문구처럼 성폭력 피해 비율이 줄어든 것은 맞지만 성폭력이라는 심각한 사안을 두고 피해자의 숫자나 피해 내용보다는 비율만 강조한 대한체육회의 시각은 안일함 그 자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대한체육회는 스포츠계 현장의 성폭력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고 발표하면서 그 이유를 대한체육회가 진행한 스포츠인권교육 때문이라고 강조했지만 인권교육이 요식행위에 그치고 있다는 반론도 나옵니다.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조재범 전 코치 성폭력 사태관련 긴급토론회'에 참석한 대한체육회 전 인권강사 A씨는 "1500명씩 모아 놓고 선수들에 대한 인권 교육을 형식적인 수준에서 진행하고 있는데 제대로 된 인권교육이 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비판한 것이죠.
◇ 성폭행 목격자는 있는데 피해자는 없다? …실태조사의 한계
대한체육회는 특히 일반인들도 누구나 원본자료를 관심 있게 읽어보면 알 수 있을만한 내용도 소홀히 했습니다.
국가대표 588명 가운데 성폭력 피해경험을 묻는 질문에 강간(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선수가 강간을 당한 것을 목격하거나 들은 적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1명(여성)이 있었습니다. 본인이 강간을 당한 피해자라고 밝힌 사람은 없지만 다른 선수의 피해를 목격한 사람은 있는 겁니다.
실태조사에선 미처 자신의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했거나 강간 피해자가 조사대상에서 제외됐을 수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상식적인 추론이지만 대한체육회는 이를 간과한 것 입니다.
또한 실태조사에서 성희롱과 성추행 피해를 경험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11명이었지만 다른 선수의 피해를 목격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30명에 달했습니다. 다른 선수의 성희롱과 성추행을 목격했다는 응답자가 자신의 피해를 직접 밝힌 응답자보다 훨씬 많은 것입니다. 물론 복수의 목격자가 있을 수 있지만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사실을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을 가능성도 따져봐야합니다.
성폭력 가해 경험을 조사한 결과도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습니다. 국가대표 지도자와 선수들에게 성폭력 가해여부를 물었더니 선수 2명이 성추행, 지도자 1명이 성희롱을 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는데요. 가해를 한 적 있다는 지도자는 여성1명이었고, 남성 지도자나 선수 중에 본인이 가해자라고 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성폭력 피해를 당했거나 목격했다는 사람은 수두룩한데 정작 가해자는 찾아볼 수 없는 통계. 사실과 다르게 응답을 하거나 본인이 가해를 했다고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이 실태조사에서 반영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실태조사 2년마다 진행하는데 '최근1년 피해'만 물어
대한체육회의 (성)폭력 실태조사는 지난 2010년부터 2년에 한 번씩 발표되고 있는데요. 2018년 조사기관으로 선정된 한남대학교 산학협력단은 지난해 6~11월 총 5개월 간 조사와 연구 분석을 진행했습니다. 실태조사는 두 차례에 걸쳐 총 3달간 진행됐습니다.
문제는 2년에 한 번씩 조사를 하면서 최근 1년 동안의 경험을 묻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 선수들이 받은 설문지를 보면 "최근 1년 동안 성희롱, 성추행 혹은 강간을 당한 적 있느냐"고 묻고 있는데요. 조사는 지난해 6월부터 시작했다고 하지만 실제 선수와 지도자 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기간은 7월과 9월, 10월 3달입니다. 최근 1년 동안의 경험을 묻다보니 조사과정에서 누락되는 기간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대한체육회 관계자는 "조사기간을 4~5개월 동안 장기간에 걸쳐 하지만 공백기가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결국 공백기에 발생한 성폭력이 실태조사에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손을 놓고 있는 셈입니다.
대한체육회는 실태조사에 대한 면밀한 분석 없이 표면적인 수치만을 내세워 스포츠계의 심각한 성폭력 현실을 외면한 것입니다. 또 외부기관에 맡겨 조사를 진행해 얻은 통계 결과가 이미 있음에도 다시 성폭력 실태조사를 진행하겠다는 임기응변식 대책을 내놓은 대한체육회의 안일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