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합병을 정부에 권유하겠다"는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 깜짝 발언의 파장이 커지고 있다.
지난 10일 취임 2주년 간담회에서 그는 "정부와 협의된 것이 아닌 사견"이라면서도 "남은 임기동안 면밀한 검토를 거쳐 정부와 협의하겠다"고 의지를 보였다.
산은 내부에서도 이 회장 개인의 소견이라는 보도자료까지 내며 진화에 나섰지만 합병대상으로 거론된 수출입은행뿐 아니라 주무부처인 금융위원회와 기획재정부도 당황한 모습이다. 이 회장의 사견이 공론화되면서 수은과 산은의 해묵은 갈등, 금융당국과 산은 수장의 미묘한 관계 등이 수면위로 떠오르는 분위기다.
◇ 수은, '사견'에 조목조목 반박
가장 반발하는 곳은 산은 본사와 2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수은이다. 수은 노조는 최근 성명서를 통해 "현 정권에 어떤 기여를 해 낙하산 회장이 됐는지 모르지만 정책금융 역할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이 회장을 비난했다.
수은은 이 회장의 깜짝 '합병 사견' 발표가 단편적인 생각이라며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이 회장은 "산은과 수은이 합병하면 강력한 정책금융기관이 나올 수 있다"고 분석했지만 수은은 '규모의 경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수은 관계자는 "올해 수은의 수출입 기업에 대한 금융지원 규모가 62조원"이라며 "자금이 모자라 해외 수주가 안되는 일은 없다"고 설명했다.
오히려 '강력한 정책금융기관'이 독이 될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회장은 규모의 경제로 가면 더 강력한 정책금융기관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독소조항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공적 수출신용기관(ECA) 역할을 맡고 있는 수은은 중장기 수출금융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경쟁 국가로부터 '보조금 공격'을 받고 있다. 국내 조선사가 대형 LNG선 등을 수주할 때 수은이 제공하는 선수급환급보증(RG)을 일본과 중국 등 경쟁국가에서 '국책금융기관의 보조금 지원'으로 문제 삼는 것이 대표적이다.
국책금융기관의 덩치가 더 커지면 보조금 논란도 더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수은 관계자는 "아직까지 해외플랜트 분야는 보조금 논란이 제기되지 않고 있는데 산은과 수은을 합친 거대 조직이 탄생하면 플랜트 분야로 논란이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어 "단순히 규모의 경제가 있다고 단편적으로 얘기할 것이 아니라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수은(여의도 본사)도 원래 우리 땅이었다"는 이 회장의 발언에 대해서도 수은은 발끈하고 있다.
수은 관계자는 "1986년 본사를 서울역 인근에서 여의도로 옮길 때 정부에서 국회 앞 부지를 불하(拂下)한 것"이라며 "민간기업도 아닌 정부가 지분 100%를 가진 산은이 땅을 넘겨줬다는 식으로 얘기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또 해외 ECA 추세도 덩치보다 내실을 강조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독일, 스페인, 캐나다 등도 적정규모의 경쟁력 강한 ECA를 특화하고 있다"며 "특히 일본 국제협력은행(JBIC)은 조직을 키웠다가 효율성이 떨어지면서 다시 조직을 쪼갰다"고 설명했다.
◇ "2013년에 이미 가르마 탔는데…"
2013년 '정책금융 역할 재정립 방안'을 통해 수은과 산은의 업무에 대해 분명히 구분 지은 당국도 6년만에 수은과 산은의 통합 얘기가 다시 나오자 당황해하는 분위기다. 당시 산은은 정책금융공사와 통합해 국내 기업금융 특화 정책금융기관으로, 수은은 정책금융공사의 해외업무를 이관 받아 중장기·대규모 해외건설·플랜트 지원으로 역할을 한정했다.
수은 관계자는 "2013년 정부에서 오랜 기간 연구를 통해 심층 검토한 결과 수은과 산은의 역할을 분담했다"며 "이미 가르마를 탔는데 다시 불을 질렀다"고 말했다.
은성수 금융위원장도 이 회장의 사견일 뿐이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지난 16일 은 위원장은 한 행사장에서 "그분(이 회장)이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더 이상 논란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합병)논쟁을 해서 우리나라 경제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덧붙였다.
금융당국 내부도 산은을 통해 통합 얘기가 나온 것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산업은행법에 따라 산은 회장은 금융위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면하고 산은의 예산도 매년 금융위에 제출해 승인을 받아야한다. 산은은 금융위가 관리·감독하는 산하기관인 것이다. 이 가운데 이 회장이 금융위와 논의를 거치지 않고 사견을 밝히면서 '금융위가 패싱됐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두 곳은 정책금융기관이지만 산은은 개발금융기관으로서, 수은은 해외 금융지원기관으로 역할이 완전히 다르다"며 "이 회장이 (청와대로부터)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더라도 말이 안되는 얘기다. 금융당국 입장에선 기분이 좋을 수 없다"고 전했다. 이어 "더욱이 은 위원장이 취임한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언의 압력을 넣고 있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산은과 수은의 합병은 부처간 합의도 필요한 사항이다. 산은은 금융위가, 수은은 기재부가 각각 관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합병이 진행될 경우 합병 법인을 어느 부처가 관할할지를 두고 신경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산은-수은 합병 발언 파장]下 불안한 산은의 무리수?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