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 기술연구를 진행하면서 사업을 구체화하자 은행들도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블록체인 플랫폼을 구축하는 등 디지털화폐 유통 대비에 분주하다.
특히 은행을 비롯한 기존 금융사들은 간편 결제 시장에서 빅테크 기업에게 밀린 상황이라 향후 간편 지급결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CBDC 시장을 선점하는 게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CBDC 유통, 민간은행 반등 기회
지난해 사업자를 선정한 한국은행 CBDC 기술연구 모의실험은 한국은행이 CBDC 제조와 발행, 환수 업무를 담당하고 민간이 유통하는 2계층 운영 방식을 가정한다.
화폐로서의 신뢰성을 보장하고, 비트코인 등 가치 변동성이 큰 다른 가상화폐와 달리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은행이 발행 등을 맡고 유통은 민간이 담당하는 구조다. CBDC 발행에 가장 앞선 중국과 유사하다.
CBDC가 발행되면 활용될 온라인 간편결제 시장은 현재 전자금융업자들이 영역을 점차 확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불과 4~5년 전만해도 은행과 카드사 등 금융사들이 전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지만 빅테크 기업들이 이 시장에 진출, 기술력과 함께 공격적인 마케팅을 앞세워 금융사들의 점유율을 빼앗았다.
실제 업권별 간편결제 서비스 점유율을 보면 금융사(은행‧카드사 등)는 2016년 56.6%에서 작년 상반기 기준 28.5%로 반토막 수준으로 줄었다. 반면 카카오페이나 네이버파이낸셜 등 전자금융업자 점유율은 26.6%에서 49.4%로 급증하면서 전체 시장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신용평가는 "빅테크의 결제사업은 자체가 목적이 아닌 고객 '록인'(Lock-in, 고객을 붙잡아두는 것)과 연계 금융상품 제공을 위한 수단"이라며 "많은 혜택을 제공해 빠르게 고객을 유입하고 있고 이에 따른 높은 성장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이유로 은행들 입장에선 CBDC가 발행됐을 때 유통시장을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 온라인 결제영역에서 전자금융업자들에 밀렸던 점유율을 회복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인 까닭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CBDC는 국가에서 발행‧운영하기 때문에 다른 가상자산보다 믿을 수 있어 은행들이 유통채널을 맡기 위해 치고나가려는 형국"이라며 "향후 CBDC가 활성화되면 이미 구축한 플랫폼을 바탕으로 경쟁자들에 비해 높은 점유율을 가져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은행들, 블록체인 플랫폼 구축 속도전
금융권은 CBDC 유통에 대비해 경쟁적으로 플랫폼 구축에 나서고 있다. 한국은행이 당장 CBDC를 발행하지는 않겠지만 발행 시점이 왔을 때 즉시 대응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은 지난 6일 블록체인 플랫폼 구축을 완료했고, 전담조직도 신설했다. 올 하반기 CBDC 유통확대 실험에도 적극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신한은행도 CBDC 발행을 대비해 지난해 LG CNS와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화폐 플랫폼 시범 구축을 마친 상태다.
하나은행은 포스텍 크립토블록체인연구센터와 함께 한국은행이 CBDC를 발행할 때 예상되는 시나리오를 검증하는 등 CBDC 도입에 적극 동참한다는 계획이다. NH농협은행은 은행장 직속으로 CBDC와 관련한 전담조직을 구축해 은행에 미치는 영향 분석과 자체 플랫폼을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KB국민은행은 한국은행 CBDC 모의실험에 사용된 블록체인 플랫폼인 클레이튼(Klaytn)을 기반으로 멀티에셋 디지털 지갑 시험 개발을 완료했다. CBDC 뿐 아니라 가상자산과 지역화폐, NFT(대체 불가능한 토큰) 등 다양한 디지털 자산 충전과 송금, 결제 등이 가능하도록 구현됐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가상자산과 NFT 대중화, 각국에서 CBDC 발행을 추진하면서 관련 플랫폼이 중요한 사업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디지털 자산의 안전한 보관 서비스 등은 '록인' 효과가 강해 향후 금융 플랫폼 성패를 가를 수 있는 키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