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큰 약국에 약이 없어?"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앞 대형약국. 약이 없다는 직원의 설명에 어르신이 당혹스러운 듯 말했다. 직원은 근처 약국에 약이 있을 테니 방문해 보라며 그를 타일렀다. 손님을 보낸 직원은 "요즘에는 의사만 아니라 약도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의약품 품귀현상이 장기화하고 있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가 이달 초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도매재고수가 공개된 전체 의약품 중 절반 이상(52.9%)의 재고가 바닥난 것으로 파악됐다.
감기약부터 항생제까지 약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부족했다. 소아용 시럽제와 변비약은 수개월 넘게 품귀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응급 항고혈압제 등 대체약이 없는 품목도 동나고 있다.
약사들이 체감하는 상황은 어떨까. 서울 종로구 바른약국에서 근무하는 김민철 약사는 "코로나19 이후부터 현재까지 의약품 부족현상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며 "감기약뿐만 아니라 이뇨제, 변비약, 인슐린제제 등이 없어 매일 도매상에 수차례씩 전화로 재고를 확인하고 있다"고 했다.
인근 서울온누리약국에서 일하는 한 약사는 "품절 약이 많은 게 사실"이라며 "약을 못 구해서 돌아가는 환자분들이 많다"고 토로했다. 이날 서너곳의 약국을 더 가봤지만 상황은 비슷했다. 약사들은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보다 문제가 심각하다"며 약 부족 현상이 장기화하는 점을 하나같이 우려했다.
한 대형약국에서 처방전을 손에 쥔 채 빈손으로 나오는 60대 환자를 만났다. 그는 처음 방문한 곳에 축농증(부비동염) 약이 없어 인근 약국으로 발길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를 따라 가보니 다행히 다른 약국에 찾는 약이 있었다.
몇 달 전 약이 없어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던 그는 "바로 처방 받을 수 있어 다행"이라며 "의사들이 어떤 약이 없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의약품 품귀현상은 코로나19 이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등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불안정해지면서 미국, 유럽 등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의약품 부족현상이 계속되는 원인으로 크게 '원료의약품 공급 불안정'과 '제약사 채산성 악화' 두 가지가 꼽힌다.
한국의 원료의약품 자급률은 2022년 기준 약 10%에 불과하다. 원료 대부분을 중국, 인도 등 해외에서 수입하는데 코로나19 이후로 품질, 물류 차질 등의 이슈로 공급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제약사들이 어렵게 원료를 구해도 채산성 문제로 선뜻 생산에 나서기 힘든 것도 약 부족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 물류비 인상 등으로 원료 가격이 올랐지만 약가는 상한선이 정해진 탓에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제약사 입장에서는 생산시설은 한정 돼있는데 수익성이 낮은 품목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제약업계 한 관계자는 "의약품 대란의 가장 큰 원인은 기업의 채산성이 맞지 않기 때문"이라며 "제약사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인데 손해를 입으면서까지 제품을 생산하기는 힘들다"고 토로했다.
정부는 이러한 고충을 들어 지난해 말부터 수급이 불안정한 의약품을 중심으로 약가인상에 속도를 내고 있다. 또 원료의약품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국산 원료를 사용하는 의약품에 약가우대를 적용할 방침이다.
약사들은 정부의 더욱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대한약사회,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등 약사단체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성명서와 22대 총선 정책제안서를 최근 잇달아 내놨다.
대한약사회는 "정부는 단기적인 품절사태의 해결을 위한 노력뿐 아니라 중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을 다하라"며 "민간에만 맡기지 말고 국가에서 국가필수의약품을 비축, 관리해 의약품 수급 불안정 사태 해결에 앞장서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밝혔다.
서울시약사회 관계자는 "의약품 부족사태로 결국 가장 큰 불편을 겪는 것은 약사가 아닌 국민으로, 조속한 해결을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야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