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데 가볍고 변형도 자유로운 플라스틱(plastic)은 화학 업계의 대표적 먹거리다. 그런데 이제는 폐플라스틱을 처리하는 일에도 화학 업계가 적극 나서고 있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팬데믹(대확산) 이후 플라스틱 사용이 더욱 급증하면서 환경 문제의 심각성이 대두된 탓이다. 코로나 이후 사용이 급증한 플라스틱 소재 물티슈는 완전 분해에 200년이나 걸린다.
그렇다고 사업을 접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플라스틱이 제공하는 편의성을 당장 대체할 수단도 딱히 발견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따라 화학업계는 폐플라스틱을 분해하는 기술, 분해하기 쉬운 플라스틱을 개발하는 수준을 넘어 이를 다양한 분야에 재활용하는 단계까지 뛰어들고 있다.
아무 모양으로나 성형이 가능하다는 뜻인 그리스어 'plastikos'에서 유래한 플라스틱 사업이 대대적 성형에 나선 셈이다.
급증하는 플라스틱 쓰레기
23일 환경부에 따르면 국내 플라스틱 생활 폐기물은 2009년 188톤에서 2018년 323톤으로 70% 이상 증가했다. 지난해 코로나 팬데믹이 선언되면서 플라스틱 문제는 최근 더욱 심각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지난해 택배·음식 배달이 전년대비 각각 20.9%, 78% 급증하면서 폐플라스틱 규모의 경우 전년대비 18.9%, 폐비닐도 9%가량 증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플라스틱 빨대의 경우 2019년 기준 9억8900만개나 사용됐다. 한국인 1인당 플라스틱 소비량은 132.7킬로그램(kg)으로 2015년 기준 세계 3위라는 통계도 있다.
이에 정부도 지난해 말 '생활폐기물 탈(脫)플라스틱 대책'을 발표하고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산업 전반에서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도록 하면서, 폐플라스틱은 다시 원료로 쓰거나 석유를 다시 뽑아내도록 하는 등 재활용률을 높이는 게 이번 대책의 골자다.
이같은 규제 움직임은 LG화학·롯데케미칼·금호석유화학·한화솔루션 등 국내 4대 화학업체에 위기로 작용할 수 있다. 이들 4개사의 지난 1분기 영업이익 합계는 전년보다 7배 가까이 증가한 3조원에 육박하는 등 코로나 특수를 누렸다. 하지만 규제는 이들의 향후 석유화학 제품 생산과 수익성 확대를 제약하는 족쇄가 될 수 있다. ▷관련기사 : 코로나에 운 '화학 빅4' 코로나 덕 함박웃음(5월11일)
빨리 썩고, 다시 쓸 수 있게
화학업계도 이에 발맞춰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LG화학은 지난달에 IMM크레딧솔루션이 4000억원 규모로 운영할 예정인 KBE(Korea Battery & ESG) 펀드에 1500억원을 출자하고 플라스틱 재활용 등 친환경 사업에 투자하기로 했다.
이 펀드는 양극재·음극재 제조, 배터리용 주요 금속 재활용 등 전기차 배터리 핵심 소재뿐만 아니라 폐플라스틱 등 고분자 제품 재활용, 바이오 플라스틱 기술 등을 포함한 친환경 산업 소재 분야에 집중 투자할 방침이다.
LG화학은 친환경 플라스틱과 생분해성 플라스틱 제품 개발도 지속하고 있다. 바이오 원료 기반의 PO(폴리올레핀), SAP(고흡수성수지), ABS(고부가합성수지) 등은 올 하반기 생산이 목표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는 고기능성 생분해 플라스틱 개발을 추진중이다.
SK이노베이션도 자회사 SK종합화학 등을 통해 폐플라스틱으로부터 석유화학원료를 만드는 열분해유 제조 및 후처리 기술을 연구중이다. 열분해유는 폐플라스틱에 열을 가해 얻는데, 제조한 열분해유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수준에 따라 순도 높은 납사 등 화학 원료도 얻어낼 수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이밖에도 △오염된 페트병과 의류 폐기물을 화학 분해해 원료를 얻는 해중합 기술 △친환경 플라스틱 소재 개발 등에 나서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플라스틱 선순환 체계 구축을 위해 재생플라스틱 소재 확대, 플라스틱 재활용 문화 개선을 중점으로 하는 프로젝트 'LOOP'를 추진하면서 친환경 지갑, 가방 등을 만들었다. 파리바게트 등을 운영하는 SPC그룹과는 바이오 페트(PET) 포장용기를 개발하기로 했다. 사탕수수를 원료로 활용하는 이 포장용기는 음료 컵이나 샐러드 용기에 사용될 예정이며 100% 재활용이 가능할 전망이다.
한화솔루션의 자회사 한화컴파운드도 SPC그룹 내 포장재 생산 기업 SPC팩과 손잡았다. 이들은 토양에서 수년 내 분해되는 PLA(Poly Lactic Acid) 기반의 친환경 플라스틱 소재를 공동 개발해 올해 하반기부터 상용화할 계획이다. 옥수수나 사탕수수와 같은 식물에서 추출한 전분을 발효해 만든 이 생분해성 플라스틱은 바이오 페트보다 분해 속도가 빠르다.
신사업 기회 찾고, 탄소배출권 부담도↓
이같은 플라스틱 관련 신사업은 상업화에 성공할 경우 새로운 수익 모델이 될 수 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폐플라스틱 100만톤을 열분해 하면 원유 540만 배럴에 해당하는 원료를 뽑아낼 수 있다"며 "쓰레기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자원으로 재사용할 수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해외 시장 진출에도 활용되고 있다. LG화학은 지난 4월 중국에서 열린 플라스틱 박람회 '차이나플라스'에서 자사의 재생 플라스틱, 썩는 플라스틱, 바이오 원료 기반 플라스틱 등 친환경 플라스틱 기술을 선보이면서 중국 시장 공략에 나선다고 밝히기도 했다.
환경 규제 강화에 따른 비용 부담도 완화할 수 있다. 정부는 석유화학 기업이 폐플라스틱 열분해유를 석유제품 원료로 활용할 경우 온실가스 감축효과를 고려해 탄소배출권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관련 지침을 개정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화학 4사의 지난해 온실가스 배출량은 총 1909만8106톤(tCO2eq·equivalent)이었다. 이에 따른 탄소 배출권 구매 비용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의 경우 탄소 배출권 구매에 연간 70억원에서 200억원 수준까지 썼다.▷관련기사: [인사이드 스토리]화학기업의 친환경은 '자기부정'일까요(4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