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반도체 경기불황 속에서도 150억달러 규모로 예정된 미국 투자를 진행할 계획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해 7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화상면담을 갖고, 반도체 R&D(연구개발) 협력과 메모리 반도체 첨단 패키징 제조 시설 등 반도체 생태계 강화에 15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미국 첨단 패키징 공장건설 진행
박정호 SK하이닉스 대표이사 부회장은 29일 경기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에서 열린 제75기 정기주주총회 이후 기자들과 만나 "미국 첨단 패키지 공장은 (어디에 건설할 지를 놓고) 현재 주(州)별로 리뷰가 끝났고, (투자를)진행할 것으로 본다"며 "전체 팹이 아니라 규모가 아주 크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HBM(고대역폭메모리) 등에서 패키징 기술이 중요해지고 있어, 고객이 가장 많이 HBM을 요구하는 미국에 (공장을) 짓는 게 나을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다만 박 부회장은 미국 반도체 공장 보조금 지원 신청 여부에 대해선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지난 27일 미국 상무부가 공개한 보조금 신청 절차의 세부 지침에 따르면 기업들은 웨이퍼 종류별 생산능력, 가동률, 예상 수율(결함 없는 합격품의 비율) 등을 상세히 공개해야 한다. 예상 현금흐름 등 수익성 지표를 제출할 때도 산출방식을 검증할 수 있는 엑셀 파일을 내야 한다. 사실상 기업의 영업기밀을 공개해야 보조금 신청이 가능하다.
이에 대해 박 부회장은 "신청 양식이 많이 까다롭더라"며 "많이 고민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에 대해선 "1년 뒤 또 유예를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현재 △18나노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 플래시 △핀펫 또는 가펫 등 비평면 트랜지스터 구조의 16나노 로직 반도체 △14나노 이하 로직 반도체 기술 및 생산 장비의 수출을 통제하면서 일부 유예조항을 두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다롄 지역에서 공장을 운영하는데, 기술 업그레이드를 위해선 네덜란드 ASML이 생산하는 극자외선(EUV) 장비 도입이 필수적이다. 이에 따라 오는 10월 유예기간 만료 후엔 다시 유예연장을 받아야 한다.
박 부회장은 추가 장비 도입 여부에 대해 "두(한국·미국) 정부가 노력을 많이 해야 할 것 같다"며 "우리는 시간을 많이 벌면서 미국과 중국 사이 여러 사안에 따라 경영 계획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지정학적 리스크는 개별 기업의 차원을 넘어 국가 차원의 일이라 근본적으로 상황을 바꾸기 쉽지 않다"며 "각국 정부와 고객 니즈에 반하지 않는 최적의 해법을 찾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동률 높였다…하반기 회복 기대감
업계에서는 올 1분기 SK하이닉스가 약 3조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경기회복 예측시점은 올 하반기 이지만, 최근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등으로 볼 때 회복시점이 미뤄질 가능성도 상존한다.
이에 SK하이닉스는 시장 상황에 따라 양산 속도를 유연하게 조절하기 위해, 고객 수요와 재고를 감안한 생산 규모 최적화를 결정했다.
박 부회장은 "설비투자(CAPEX) 지출은 작년 19조원에서 올해 50% 이상 절감된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며 "운영비용(OPEX)도 모든 비용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올해 처음으로 전년 대비 감소하는 환경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요 감소에 따라 조정했던 가동률도 일부 제품에 한해 다시 높이고 있다. 올해부터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DDR(더블데이터레이트)5와 챗GPT에 활용되는 것으로 알려진 HBM이 대표적이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은 "DDR5, HBM 등 첨단 제품을 중심으로 가동률을 높이고 있다"며 "서버용 일부 제품은 수요가 타이트한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21년 인텔로부터 인수한 솔리다임도 올해 본격적인 시너지를 기대하고 있다. 솔리다임을 포함한 SK하이닉스 미국 낸드 법인(SK hynix NAND Product Solutions Corp)은 작년 3조3257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바 있다.
박 부회장은 "불황 영향으로 부진한 성과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시너지 창출을 위한 여러 활동을 진행 중"이라며 "2023년 반드시 성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미국 회사의 주식을 인수해 한국 회사와 문화적으로 결합 시키는 게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점을 감안, 솔리다임 인수 후 2년 내 시너지를 창출하면 시장 경쟁력 강화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주총에서 SK하이닉스는 재무제표 승인, 사외이사·감사위원·기타비상무이사 선임, 이사 보수 한도 승인 등 모든 안건을 원안대로 가결했다. 한애라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사외이사로 재선임하고, 김정원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정덕균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석좌교수를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기타비상무이사에는 박성하 SK스퀘어 사장을 신규 선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