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의 '파나마 문건' 폭로로 '조세회피' 문제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높아졌습니다.
국내에서는 뉴스타파의 보도를 통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 씨와 아모레퍼시픽 오너 일가가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것으로 드러나 큰 파장이 일었죠.
그런데 문제는 세금을 피하려는 행위, 조세회피(tax avoidance)는 엄밀히 말하면 그 자체만으로는 법적 처벌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조세회피를 한 기업이나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조세 '포탈' 혐의를 추가로 입증해내거나, 회피 과정에서 배임·횡령과 같은 다른 범법을 저질렀는지 밝혀내 그것을 근거로 처벌해야 합니다.
하지만 법적 처벌대상 여부와 관계 없이 조세회피는 사회적 공분을 삽니다. 특정 국가의 인적·물적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해 돈을 번 뒤, 세금은 나몰라라 하니 사회적 지탄을 받는 것이죠.
이 때문에 조세회피 사실을 낱낱이 공개하는 식의 '사회적 처벌'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이 같은 방식을 두고 '이름 불러 망신주기'(naming and shaming)라고 하는데요.
조세회피와 관련해서는 택스 셰이밍(tax shaming)이라는 용어가 최근 새롭게 주목 받고 있습니다. 의역한다면 '체납자 망신주기'쯤 될 것 같은데요. 택스 셰이밍은 윤리적이지 못한 절세나 그 자체로 불법인 탈세 모두에 적용됩니다.
쉽게 말해, 조세회피·포탈자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함으로써 자발적 납세를 유도하는 겁니다. 실제 이 방식은 언론보도나 과세당국의 행정처분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인도 뭄바이 인근의 한 도시 타네 시가 시도한 '북 치는 악단' 파견을 통한 세금 추징 방법을 소개했는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타네 시의 한 부동산 개발업자 S씨는 세금을 내라는 정부의 명령을 5년 동안 무시했습니다. 이에 타네 시가 당국의 직원과 함께 북 치는 악단을 그의 집 앞으로 보냈고, 악단은 S씨 집 앞에서 북을 치기 시작합니다. 동네 주민들은 일제히 창문에 기대 무슨 영문인지 바라봅니다.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얼굴이 벌개져 문 밖에 나온 S씨는 오래도록 내지 않았던 세금 945달러를 그 자리에서 납부합니다.
상습 체납자를 공공연히 창피하게 만듦으로써 세금을 받아낸 겁니다. 평판을 중요시하는 사회일수록 이 방법은 잘 먹힌다고 하는데요. 타네 시의 경우 올 초 '북 치는 악단' 도입 이후 재산세 세수입이 20%나 뛰었다고 합니다.
한국도 사회적 평판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국세청도 택스 셰이밍의 일환으로 몇 가지 방법을 도입해 쓰고 있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액·상습 체납자 명단 공개'입니다. 명단은 매년 국세청 홈페이지와 관보, 세무서 게시판 등을 통해 공개되고, 이는 언론을 통해 여러 곳으로 유포됩니다.
이 밖에도 국가 단위에서 행해지는 택스 셰이밍에는 이른바 빨간딱지를 붙이는 '부동산 압류'와 카드 사용을 정지하는 '금융기관 신용정보 제공' 등이 있습니다. 지자체에서는 여기에 더해 자동차 번호판을 떼어가는 '자동차번호판 영치', 도메인에 빨간딱지를 붙이는 '도메인 압류' 등도 시행하고 있습니다.
택스 셰이밍을 당한 사람들의 가장 흔한 반응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야 되느냐"인 것 같습니다. 인터넷 게시판 등을 통해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과도한 행정편의주의'라는 비판이죠.
하지만 사안이 대기업이나 대기업 총수일가의 수십·수백 억대 조세회피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그에 따른 사회적 손실이 어마어마함에도 연관된 다른 위법 행위를 적발하지 못하면 어떠한 처벌도 불가능하니까요. 이 경우, 사회 일부의 과도한 욕심에 따른 부작용을 바로잡기에는 택스 셰이밍만한 방법도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