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그라피카(Paragraphica)는 덴마크 출신 디자이너인 비요른 카르만이 발명한 카메라다. '렌즈 없는 카메라'로 온라인 상에서 이목을 끌었다. 실제로 이 카메라를 사용해보니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탑재한 만보기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구글 지도나 네이버 지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건물 모습을 날씨 등 현장의 주변 정보를 조합한 이미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AI 기반으로 사진을 출력하기 때문에 실제 카메라를 구입할 필요는 없다. 사진기 역할은 스마트폰이 대신한다. 스마트폰에서 파라그라피카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2달러에 36장을 찍을 수 있는 가상 필름을 파는데, 그걸 사야 파라그라피카를 쓸 수 있다.
파라그라피카 웹사이트에는 3개의 다이얼과 셔터 버튼이 있다. 다이얼을 통해 사진에 반영하는 AI의 강도와 사진 스타일, 그리고 사진을 촬영하는 연도를 설정할 수 있다. AI 강도를 높이면 사진을 만드는 AI 관여도가 올라가 현실과 왜곡이 심해진다. 사진 스타일 다이얼을 돌리면 흔히 스마트폰 카메라에서 쓸 수 있는 흑백, 블러(흐림) 등의 효과를 적용할 수 있다.
직접 찍어보기로 했다. 서울 명소인 △강남대로 △국회의사당 △광화문으로 향했다.
강남대로에서 웹사이트를 열고 실행했더니 파라그라피카 화면에 문구가 떴다.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 433 아침. 구름이 하늘을 덮은 날씨로 27도. 날짜는 2023년 7월17일 월요일. 주변에 성형외과와 미용업소가 있음."
빨간색 모양의 셔터를 누르자 잠시 뒤 사진이 나왔다. 하지만 파라그라피카가 찍은 강남대로는 실제 모습과 큰 차이가 있었다. 사진에 담긴 강남대로는 좁은 골목길에 가게가 줄지어 늘어섰다. 가게 간판의 글자는 알아볼 수 없는 형태의 문자로 표현됐다.
국회와 광화문 앞에서도 각각 10장의 사진을 찍었다. 국회에서 찍은 사진에는 1킬로미터(km) 이상 떨어진 한국거래소 앞 모습과 비슷한 이미지가 나왔다. 생명체 하나 없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다. 광화문 앞에서는 이순신 동상이 없는 엉뚱한 풍경이 담겼다. 행인이나 길가의 꽃 한 송이도 표현하지 못했다.
파라그라피카 사진은 '찍는다'기보다 '생성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위치와 날씨정보 등을 조합해 AI가 적당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텍스트 정보를 이미지로 변환하는 초기단계 AI라고 볼 수 있는데, 왜곡이 심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현실과 다른 정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이용자에게 제공하는 챗GPT의 '환각(할루시네이션)' 현상을 이미지로 보는 느낌이랄까.
얄팍한 상술에 당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만약 AI가 인식하는 현실세계가 정말 이와 같다면? 파라그라피카 사진에는 사람이나 동물이 없다. 표현해내지 못한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막강한 기능을 수행하는 AI가 어느날 자신의 인식체계에서 인간을 지우기 시작한다면 인류는 어떻게 될까. '공각기동대'와 '메트릭스'를 본 뒤의 여운 같은 게 느껴졌다.
파라그라피카가 현실과 다른 모습의 사진을 출력하는 이유는 생성형 AI의 학습 방식 때문이다. AI는 유명 빌딩부터 단독주택에 이르기까지의 건축물을 구분하지 않고 '건물'이라고 학습한다. 지역을 대표하는 건물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입력할 때 따로 구분하거나 설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AI 업계 관계자는 "파라그라피카가 따로 유명 건물을 학습하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학습할 때 인위적으로 조건을 설정해줘야 한다"며 "이용자가 원하는 피사체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 때문에 카메라로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실과 다른 모습을 나타내는 환각 현상이 예술 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역발상을 제시하기도 했다.
김명주 서울여대 바른AI연구센터장은 "파라그라피카는 사진을 만든다는 게 다를 뿐 챗GPT와 결과물을 만드는 원리는 똑같다"며 "현실과 간극이 너무 큰 결과물만 내놓지 않는다면 파라그라피카와 같은 도구는 예술가의 상상력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쓰일 순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