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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人워치]개량신약 R&D 전문가, 그림에 빠지다

  • 2024.08.08(목) 06:30

정원태 유나이티드제약 부사장 인터뷰
태블릿으로 독학한 미술로 전시회까지
"그림 그리며 마음의 위로 찾아"

학창 시절 미술을 좋아했지만 영 소질이 없었다. 미술학원도 다녀봤지만 좀처럼 그림 실력이 늘지 않아 일찌감치 포기했다. 지금도 사람을 그리면 2000년대 초반에 인기를 끌었던 졸라맨처럼 머리는 동그라미, 몸체는 작대기로 그리는 수준이다.

그리는 데에 소질이 없고 그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지만 이따금 전시회에 들러 감상에 젖곤 한다. 이 그림을 그린 작가의 의도가 무엇일까, 때론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지금 나의 상황에 빗대어 작품을 해석하면서 지친 마음에 위로를 얻는다.

그런데 최근 수십년 간 연구개발(R&D)을 진행해 온 한 제약사 임원이 독학으로 미술에 입문해 전시회까지 연다는 소식에 귀가 솔깃했다. 국내 개량신약 산업의 포문을 연 중견 제약사 한국유나이티드제약의 정원태 부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올해 63세인 정 부사장은 약대(약사) 출신으로 제약회사에서 41년간 한 우물만 파온 R&D 전문가다. 소위 약밥만 먹던 그의 미술 이야기가 궁금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태블릿 통해 다양한 장르의 미술작품 경험 쌓아

정 부사장의 사무실은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유나이티드갤러리 건물 2층에 자리하고 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환한 미소로 반기던 그는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쑥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전시회는 7일부터 오는 12일까지로, 방문한 날은 아직 전시회 전이어서 사무실 안쪽에 몇몇 작품들이 놓여있었다.

한국유나이티드제약 정원태 부사장이 유나이티드갤러리에서 7일부터 오는 12일까지 태플릿 회화전을 개최하고 있다.  정 부사장이 가장 애정을 갖고 있는 작품인 '일월오봉도' 옆에 섰다./사진=유나이티드제약

정 부사장은 "학창시절에 미술시간을 특히 좋아했다"며 "그냥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연필로 스케치를 하다 40대 이후부터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운을 뗐다.

그가 이번에 전시회에 거는 작품들은 캔버스에 직접 그린 게 아닌 태블릿에 그린 그림을 캔버스로 옮겨 담은 디지털아트다. 아무런 도구 없이 태블릿 하나면 민화, 펜화, 수채화, 유화 등 다양한 장르의 미술작품을 그릴 수 있다. 종이에 그린 그림을 종종 잃어버리자 자녀로부터 태블릿을 선물로 받은 게 디지털아트를 시작한 계기가 됐다. 대부분 민화, 자연풍경, 건축물을 담은 작품이었고 한국화 기법이 많이 엿보였다.

54개 전시작 중 애착 작품은 '일월오봉도'

수십년 간 그가 그린 수백개의 작품 중 이번에 전시하는 제품은 54개다. 그중에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으로는 일월오봉도를 꼽았다. 일월오봉도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을 그린 그림으로,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봤다면 한 번쯤은 봤을 그림이다. 왕은 해, 왕비는 달을 의미하는데 왕과 왕비의 무병장수와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

정 부사장은 "일월오봉도는 가장 손이 많이 갔던 작품이기도 하고 이런 소재의 그림은 이런 배치로 그리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배우는 점이 많았다"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마치 20~30년 전 우리나라 풍경 같은 대만의 거리풍경도 기억에 많이 남아 틈틈이 그리고 있다"고 했다.

관람객들에게 배포하는 기념 엽서에 담긴 정원태 부사장의 '비엔나약국' 작품.

개인적으로 눈길을 끈 건 '비엔나약국'이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길거리에 흔하디 흔한 약국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었던 걸까.

정 부사장은 "오스트리아로 출장 갔을 때였다. 그 약국을 지나던 순간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프로이드가 생각났다"면서 "비엔나라는 도심 속 약국 분위기가 왠지 정신분열증 같은 약을 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며 웃으며 말했다.

약사 출신다운 발상이었다. 그는 2010년 한국유나이티드제약의 대표 진통해열소염제이자 개량신약 1호인 클란자CR정을 개발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대부분의 개량신약 개발에 직접 관여해왔다.

"그림 그릴 때면 마음이 위로받는 느낌"

바쁜 R&D 업무에도 그가 태블릿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이유는 치유였다. 정 부사장은 "독학이라고 할 것도 없고 누구나 이 정도 그림은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좋아하고 즐기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다"며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들이 순간 싹 사라지고 마음이 위로받는 느낌"이라고 했다.

한국유나이티드제약 정원태 부사장은 그림을 통해 마음의 위로를 얻는다고 했다. /사진=유나이티드제약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곧 기회로 다가왔다. 한국유나이티드제약 본사는 학동역 인근에 있지만 정 부사장이 속해있는 글로벌 개발본부는 신논현역 근처 유나이티드갤러리 건물 2층에 자리하고 있다. 이에 정 부사장은 시간이 날 때면 1층 갤러리에 내려가 전시회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정 부사장은 "전시회를 둘러보다 큐레이터에게 자신의 그림을 몇 점 보여준 적이 있는데 갑자기 이달 7~12일 1주일간 갤러리가 비어있다며 전시회 제안을 해왔다"며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내년 말까지 갤러리 전시 일정이 꽉 차 있어 이때 아니면 영영 못할 것 같아서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전시회를 찾아주는 관람객들을 위해 작품이 새겨진 엽서와 스티커를 제작하기도 했다. 정 부사장은 "전시회를 준비하기까지 너무 힘들었지만 전시회가 코앞으로 다가오니 설렌다"면서 "앞으로 또 전시회를 열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태블릿이 망가질 때까지 그리고 또 그릴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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