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계 제약사인 GSK(글락소스미스클라인)가 국내 바이오기업인 에이비엘바이오와 4조원 규모의 플랫폼(원천기술) 도입 계약을 체결해 배경에 관심이 모인다. GSK는 다른 빅파마와 달리 유전학을 토대로 신규 타깃(생물학적 원인)을 직접 발굴했다. 이를 뇌에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 에이비엘바이오의 기술을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GSK의 남다른 행보
GSK는 지난 7일 에이비엘바이오의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 개발 플랫폼 '그랩바디-B'를 총 계약 규모 21억4010만파운드(4조1100억원)에 도입했다. GSK가 보유한 복수의 신규 타깃 후보물질에 그랩바디-B를 적용할 수 있는 독점 권리를 이전받는 것이 골자다.
GSK는 이번 계약에서 아밀로이드 베타, 타우 등 현재 알츠하이머 치료제로 가장 활발히 개발되고 있는 타깃을 포함하지 않았다. 상업성이 큰 타깃을 제외했다는 점에서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이다. 하지만 GSK만의 독특한 신약개발 철학이 배경에 있다는 점을 알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GSK는 지난 2017년 엠마 월슬리 현 GSK 대표가 취임하면서 유전학 기반으로 신약 R&D(연구개발) 전략을 재편했다. 신약후보물질을 개발하기 전에 먼저 유전학적으로 검증된 타깃인지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GSK는 뇌신경질환 분야에서 경쟁사들과 달리 신약후보물질을 바로 도입하기보다 신규 타깃을 발굴하는 데 몰두했다. GSK는 지난 2021년 영국 옥스포드대학과 뇌신경질환 신규 타깃 등을 발굴하는 신약 개발 연구소를 차렸다. 이어 지난해 베살리우스 테라퓨틱스, 무나 테라퓨틱스와 각각 알츠하이머, 파킨슨병 신규 타깃 발굴을 위한 연구협력 계약을 맺었다. 올리고 치료제 주목한 이유는
GSK는 이렇게 발굴한 신규 타깃을 공략할 모달리티(약물이 약효를 전달하는 방법)로 올리고 기반의 RNA 치료제에 주목하고 있다. 올리고 치료제는 유전자의 결함이나 과발현을 직접 조절하는 방식으로 작용해 GSK가 발굴한 타깃을 공략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지난 2022년 GSK는 미국계 바이오기업인 웨이브 라이프사이언스로부터 올리고 치료제 플랫폼을 처음 도입했다. 이어 지난해 올리고 치료제 플랫폼을 보유한 엘시 바이오테크놀로지를 5000만달러(700억원)에 인수했다.
웨이브 라이프사이언스와 계약을 맺은 이후 존 레포어 GSK 연구소장은 한 외신과 인터뷰에서 "GSK의 포트폴리오 70%가 강한 유전학 근거를 갖추고 있다"며 "유전학으로부터 나온 다양한 범위의 약물타깃을 고려할 때 웨이브의 올리고 플랫폼이 우리의 관심사와 맞닿아 있었다"고 밝혔다.
GSK가 이번에 에이비엘바이오의 플랫폼으로 개발할 약물 중에도 항체치료제뿐만 아니라 siRNA(짧은 간섭 리보핵산), ASO(안티센스 올리고) 등 올리고 기반의 RNA 치료제가 다수 포함돼 있다.
그랩바디-B를 잡은 이유
하지만 GSK는 뇌신경질환 신규 타깃을 올리고 치료제로 자체 개발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맞닥뜨렸다. 뇌신경질환은 다른 질환과 달리 개발 난이도가 무척 높은 편이다. 가장 큰 이유는 외부물질로부터 뇌를 보호하는 뇌혈관장벽(BBB)로 인해 약물이 타깃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서다.
게다가 RNA 치료제는 정맥에 투여하면 간에 집중적으로 축적되는 특성이 있다. 실제 현재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허가받은 siRNA 치료제는 총 7개인데, 이들 약물은 모두 간에서 발현되는 특정 유전자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 분야에서 글로벌 선두로 꼽히는 앨나일람파마슈티컬스도 뇌신경질환 분야에서는 더딘 성과를 내고 있다. 대표 파이프라인은 알츠하이머 치료제로 개발 중인 '미벨시란'이다. 임상에서 우수한 약효를 냈지만 척수를 통해 뇌에 투여하는 방법으로 투약 편의성이 낮다. 이를 공동 개발하던 미국계 제약사는 리제네론은 지난해 파트너십을 해지했다.
GSK는 해결책을 찾던 과정에서 에이비엘바이오의 '그랩바디-B' 플랫폼을 발견했다. 그랩바디-B는 정맥으로 투여한 약물을 뇌세포 표면에 발현하는 'IGF1R(인슐린 유사 성장인자 1 수용체)'에 결합시켜 뇌 안으로 보내는 기술이다. IGF1R은 뇌에 영양분을 직접 공급하는 일종의 수송 통로다.
에이비엘바이오는 지난 1년여간 그랩바디-B를 항체를 넘어 올리고 치료제에 적용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현재까지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에이비엘바이오는 미국의 올리고 치료제 개발사인 아이오니스와 시행한 연구에서 그랩바디-B가 뇌에 올리고 약물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효과를 확인했다.
임상에서 성과가 나오면 에이비엘바이오 입장에서는 다른 빅파마와 추가 기술이전을 기대할 수 있다. 노바티스, 로슈 등 빅파마들이 올리고 치료제 개발에 속도를 낸 가운데 에이비엘바이오와 GSK가 맺은 독점 계약 타깃에는 아밀로이드 베타, 타우 등 이미 시장에서 검증된 타깃이 포함돼 있지 않아서다.
에이비엘바이오 관계자는 "GSK와의 계약 이후 그랩바디-B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는 기업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며 "전략적인 사유로 논의가 중단됐던 기업들은 다시 논의를 재개했고, 새로운 기업은 물론이고 MTA(물질이전계약) 없이 빠르게 협상을 진행하고 싶다는 기업도 많아졌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