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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한끗]②죠리퐁, '3가지 벽'을 넘어서다

  • 2022.03.09(수) 11:05

저품질 스낵 편견 ‘품질’로 뛰어넘어
경쟁제품 등장하자 ‘종이 스푼’ 맞불
'콜라보' 등으로 브랜드 노후화 극복

/그래픽=비즈니스워치

역사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꼭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우리 곁에서 사랑받고 있는 많은 제품들에도 결정적인 '한 끗'이 있습니다. 그 한 끗 차이가 제품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비즈니스워치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에 숨겨져 있는 그 한 끗을 알아봤습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있는 제품의 전부를, 성공 비밀을 함께 찾아보시죠. [편집자]

한 제품이 인기가 영원하기는 어렵습니다. 경쟁사가 비슷한 제품을 쏟아내며 '원조'의 위상이 흔들리니까요. 단, 과자는 예외입니다.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제품이 수십 년간 판매되고 있습니다. 표준을 정하기 힘든 '입맛'을 공략하는 제품이기 때문일 겁니다. 죠리퐁이 그런 제품입니다. 큰 변화 없이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죠. 하지만 이런 죠리퐁도 난관이 있었습니다. 죠리퐁이 넘어선 세 개의 '벽'을 소개합니다.

소비자들의 '동경'을 마케팅하다

죠리퐁이 출시됐던 1972년 당시 스낵은 소비자들에게 생소했습니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저품질 양산형 제품이 대부분이었던 스낵에 대한 불신도 컸고요.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기술·인프라에 투자하면서까지 스낵 시장에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경제 부흥에 집중하던 시기였습니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스낵은 사치품이었습니다.

죠리퐁도 특별한 제품은 아니었습니다. 소비자들은 죠리퐁과 같은 '퍼핑 스낵'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뻥튀기와 비슷했으니까요. 설상가상으로 죠리퐁은 비쌌습니다. 경쟁 스낵류에 비해 두 배 가량 가격이 높았습니다. 당시 최고급 비스킷이었던 같은 회사의 산도보다도 비쌌습니다. 자연스럽게 출시 초기 죠리퐁은 시장에서 외면받았습니다.

양산형 과자를 비판하는 1972년 신문보도(좌)와 크라운제과의 매출 1000억 돌파를 다룬 1984년 보도. /사진=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윤영달 크라운제과 상무(현 크라운해태제과 회장)는 죠리퐁을 '선진국형 스낵'으로 마케팅합니다. 죠리퐁을 먹으면 동경하는 '미국식 라이프 스타일'을 즐길 수 있다고 강조한 겁니다. 첫 유통 경로도 서울 용산 주한 미군 기지였습니다. 윤 상무가 직접 용산 근처 슈퍼마켓들을 돌며 죠리퐁의 장점을 적극 어필했습니다. 덕분에 죠리퐁이 드디어 용산 미군 기지 근처 매장에 입성합니다.

그의 전략은 적중했습니다. 얼마지나지 않아 죠리퐁은 주한 미군과 그 가족들의 '최애템'이 됩니다. 죠리퐁의 가격은 당시 200원대였던 미국산 씨리얼의 4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만족감은 씨리얼과 비슷했죠. 이들은 죠리퐁에 열광합니다. 죠리퐁이 '미국 사람'들에게 통한 겁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죠리퐁은 순식간에 동이 납니다. 도매상들이 공장에 줄을 서서 죠리퐁 생산만 기다렸죠.

'혁신'으로 제친 라이벌

하지만 영광의 시간은 짧았습니다. 출시 이듬해 품질에 문제가 생깁니다. 죠리퐁은 밀쌀에 단맛을 입힌 제품입니다. 건조가 생명이죠. 당시 건조 과정은 기술적 한계 탓에 수동으로 진행됐습니다. 여기서 사달이 납니다. 장마철이 오면서 습기 탓에 낱알이 서로 달라붙어 굳어버립니다. 더위에 당밀이 녹아내리기도 했습니다. 죠리퐁 특유의 식감을 살릴 수 없게 됐습니다. 결국 여름철에는 죠리퐁 생산을 줄여야했습니다.

이 문제는 1978년 자동건조기가 도입되며 해결됩니다. 하지만 그 사이 죠리퐁에 대한 소비자 불만도 높아졌죠. 표면이 거칠어 식감이 좋지 않다는 클레임이 이어집니다. 이에 크라운제과는 분당(설탕)을 뿌리던 제조 방식을 당액을 코팅하는 방식으로 바꿉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죠리퐁은 이렇게 완성됐습니다. 이후 죠리퐁은 전성기를 맞습니다. 매년 판매량이 상승곡선을 그리며 최고 히트제품 자리에 등극합니다.

/그래픽=김용민 기자 kym5380@

죠리퐁의 두 번째 위기는 198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경제 상황이 나아지자 죠리퐁의 '원조 제품'인 씨리얼이 국내에 상륙합니다. 1988년 농심이 켈로그와 손잡고 '콘푸로스트'를 내놓습니다. 몇 년 후에는 동서식품이 '콘푸라이트'를 출시했죠. 소비자는 죠리퐁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는 이 제품에 관심을 갖습니다. 죠리퐁이 출시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라이벌을 마주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크라운제과는 '맞불'을 놓습니다. 1995년부터 죠리퐁에 종이스푼을 넣습니다. 이듬해에는 커피맛 '죠리퐁 라이트'를 출시하며 라인업을 늘립니다. 덕분에 죠리퐁의 매출은 증가하면서 1998년 누적 3000억원을 넘어섭니다. 크라운제과는 이런 핵심 제품의 성공에 힘입어 외환위기임에도 제과 사업을 지켜냅니다. 2005년에는 덩치가 더 컸던 해태제과를 인수, 크라운해태그룹을 완성합니다.

죠리퐁, 세월을 이긴 비결은 이것

죠리퐁의 세 번째 벽은 바로 '세월'이었습니다. 씨리얼 제품이 쏟아지면서 스낵 시장에도 참신한 신제품들이 자리잡습니다. 수십년간 판매됐던 죠리퐁은 이제 옛날 브랜드가 됐죠. 소비자들도 지루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시도를 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브랜드 노후화에 벤치마킹할 제품도 딱히 없었으니까요. 결국 죠리퐁의 매출은 2014년 207억원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2016년에는 195억원까지 떨어집니다.

고심하던 크라운해태제과는 '콜라보'에서 활로를 찾습니다. 2017년 커피 브랜드 쟈뎅과 손잡고 '죠리퐁 카페라떼'를 내놓습니다. SNS에서 유행했던 레시피를 상품화했습니다. 이어 이랜드의 자연별곡에 '죠리퐁 빙수'를 계절 메뉴로 선보입니다. 지금에야 콜라보가 흔한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혁신적이었습니다. 이 전략은 '대박'을 칩니다. 이를 계기로 죠리퐁은 젊은 소비자에게 친숙한 제품으로 각인됩니다.

'희망과자 프로젝트'가 담긴 죠리퐁(좌)과 쟈뎅 콜라보 제품(우). /사진=크라운해태

탁월한 마케팅도 빛을 발합니다. 크라운해태제과는 죠리퐁 봉지를 통한 사회적 마케팅을 진행해 왔습니다. 외환위기 시절 '아나바다(아껴쓰고·나눠쓰고·바꿔쓰고·다시쓰자) 캠페인'을 전개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크라운해태제과는 2016년 죠리퐁 450만봉에 실종 아동의 정보를 담는 '희망과자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실제로 이 프로젝트를 통해 잃었던 가족을 찾는 사례가 나오면서 죠리퐁은 주목받게 됩니다.

죠리퐁은 세 번의 시련을 모두 획기적인 방법으로 이겨냅니다. 그리고 죠리퐁은 인기 디저트로 재탄생합니다. 2017년 매출이 206억원으로 반등합니다. 2년 후에는 사상 최고치인 250억원을 달성하죠. 불황이었던 제과업계에소 나홀로 성장합니다. 이런 인기는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계속한 덕분입니다.

다음에 준비한 내용은 죠리퐁 탄생의 비밀을 알려드릴까 합니다. 도대체 죠리퐁 제조 과정에는 어떤 비밀들이 숨어있길래 50년간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죠리퐁처럼 바삭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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