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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스토리]염정아가 꿈꾼 마트 정규직

  • 2019.02.08(금) 16:22

홈플러스 '무기계약직 전원 정규직 전환' 파격
롯데마트 비롯 다른 대형마트들도 고민 불가피

영화 '카트' 캡처 화면.

"한선희 여사님, 앞으로 나오세요. 5년 전에 입사해 까대기(분류 작업), 판매, 계산 업무까지. 벌점 1점도 없이 일해오신 분입니다. 3개월 후에 드디어 정직원이 되십니다. 열심히 일하면 정직원 되는 거예요. 정직원." (영화 카트 中)

지난 2014년 개봉한 영화 카트의 주인공 중 한 명인 한선희(염정아) 씨는 더마트라는 대형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였습니다. 그는 야근을 불사하고 성실히 일한 끝에 '정규직' 전환을 약속받는데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얼마 뒤 동료들과 함께 단체 해고 통보를 받고 좌절하게 됩니다.

회사는 마트 매각을 앞두고 비정규직을 용역으로 돌리기 위해 이들을 일방적으로 해고합니다. 이에 반발한 '비정규직'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회사를 상대로 길고 긴 투쟁에 돌입합니다.

이 영화는 지난 2007년 실제로 벌어진 이른바 '이랜드 사태'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랜드는 홈에버의 계산대 직원을 외주화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량 해고했는데요. 그러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510일에 달하는 기나긴 파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홈플러스 매장. (사진=홈플러스 제공)

홈에버는 다음 해 홈플러스테스코(현 홈플러스)에 인수됩니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 2000명가량이 이른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면서 '고용 안정'을 보장받게 됩니다. 당시 노조위원장 등 간부 12명이 해고되는 '희생'을 치러야 했지만 확실한 성과를 거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꼽힙니다.

영화 '카트'는 마지막 장면에서 '지도부들의 희생으로 이룬 절반의 승리였다'는 문구로 평가를 대신합니다.

'이랜드 사태'가 끝난 뒤 10년이 지났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이 노동자들은 과연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차별받지 않고 일해왔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건이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정규직'과는 다른 대우를 받아왔습니다.

홈플러스를 비롯해 국내 주요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계산대 직원들과 판매·진열사원들은 대부분 '무기계약직'입니다.

무기계약직은 고용이 안정된 데다가 학자금 지원과 퇴직금, 복지 혜택 등이 정규직과 동일하게 주어지는데요. 그러나 임금과 승진 체계는 정규직과 다릅니다. 임금은 적고 승진은 사실상 어려웠던 겁니다. 그래서 일각에선 이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중간 형태라는 의미로 '중규직'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그러다가 지난해 초 놀라운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영화 카트의 실제 주인공들의 '염원'이 통했던 걸까요. 홈플러스에서 일하던 무기계약직 노동자 중 일부를 '진짜'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한 겁니다.

홈플러스는 기존 홈플러스와 홈에버를 인수한 뒤 만든 '홈플러스스토어즈' 2개 법인으로 나뉘어 있는데요. 이중 홈플러스스토어즈 소속 무기계약직 중 12년 이상 근무한 직원 430여 명을 지난 7월 정규직으로 발탁한 겁니다. 이후 11월엔 홈플러스 소속 12년 이상 근속 무기계약직 사원 6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습니다.

올해는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홈플러스는 아예 무기계약직 전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했습니다. 홈플러스 소속 1만2000명과 홈플러스스토어즈 소속 3000명이 대상입니다.

이들은 이제 정규직 직급 체계에 따라 '사원'이 아닌 '선임'으로 불리게 됩니다. 4년간 '선임'을 지낸 뒤에는 '주임'이 되고, 다시 4년 뒤에는 '대리'가 되는 식의 승진 길도 열렸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홈플러스는 지난달 31일 무기계약직 전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을 공식화했는데요. 노조는 전날인 30일까지만 해도 거리에서 집회를 하며, 설 명절 직전 주말인 2월 2~3일 전국 총파업을 예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갈등이 극에 달한 뒤에서야 '극적인' 타협을 이뤄낸 셈입니다.

영화 카트의 다른 주인공인 혜미(문정희)는 노조 가입서를 나눠주면서 "혼자서 아무리 회사에 말해봐야 씨도 안 먹힌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번 건도 무기계약직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모은 덕분에 이뤄낸 성과가 분명합니다.

홈플러스 본사 전경. (사진=홈플러스 제공)

하지만 노동자들이 힘을 모은다고 해서 무조건 일이 잘 풀리는 건 아닙니다. 사측의 '통 큰' 결단도 필요했습니다.

홈플러스는 임일순 사장이 취임한 뒤 무기계약직의 정규직 전환을 확대해왔는데요. 이번에도 임금협상 과정에서 연봉 인상률을 두고 노사 간 줄다리기가 이어지자 그보다는 처우개선이나 고용안정 방안이 양측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이번 합의를 이끌어낸 것으로 전해집니다.

홈플러스의 이번 결정은 다른 대형마트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 이마트와 롯데마트의 계산대 직원들과 판매·진열사원들은 무기계약직으로 있는데요. 이마트의 경우 이들도 모두 정규직이라는 입장이지만, 노조는 정규직과는 다른 승진 체계를 적용받는 '중규직'으로 보고 있습니다.

같은 업종에서 '정규직 전환'이 성사된 만큼 이마트와 롯데마트 노조 역시 앞으로 협상에서 같은 조건을 요구할 가능성이 큽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이마트와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마트 3사의 경우 그동안 무기계약직에 대한 임금 수준이나 처우를 비슷하게 맞춰온 경향이 있다"며 "이번 홈플러스 건으로 경쟁사들도 고민하고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홈플러스에 이어 이마트와 롯데마트도 과연 신선한 파격에 동참할지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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