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금융지주와 시중은행들이 중동발 위기에 비상체제를 재가동했다. 지난 12·3 계엄 이후 반년만이다.
이들은 환율과 유가 변동성 등을 긴급 점검했다. 환율 변동폭이 커질 경우에 대비해 금융지주 건전성 관리에 더욱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직접적인 피해가 우려되는 기업들 대상 금융지원도 우선 실시하기로 했다.

KB금융지주, 신한금융지주, 우리은행은 23일 오전 긴급회의를 열고 중동 사태로 인한 지정학적 리스크와 글로벌 금융시장 파급 등을 점검했다. 이날 오후에는 신한은행이 긴급회의를 연다. 우리금융지주는 지난 22일 임종룡 회장 주재로 중동발 사태에 따른 금융시장 여파를 진단했다. 지난 주말 이호성 하나은행장도 딜링룸을 찾아 시장 상황을 살폈다.비상체제 가동…기업부터 지원
주요 금융지주사와 시중은행들은 원·달러 환율 변동부터 들여다봤다. 임종룡 회장은 "과거 경험으로 볼 때 원·달러 환율 상승, 주가지수 하락 등 국내 금융시장과 외환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KB금융은 비상대응체계를 상시 운영하기로 했고 신한금융은 주 1회 정례 회의 체계를 가동하기로 했다.
새 정부 출범 후 달러당 1350~1370원대로 안정되는 듯했던 원달러환율은 이날 달러당 1380원대에서 거래되고 있다. 장중 달러당 1385.10원을 터치하기도 했다. 20일 만에 기록한 최대치다. 더불어 금융지주사와 시중은행들은 전 세계 원유의 20%가 유통되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을 열어두고 국제유가 리스크도 분석했다.
환율과 유가 변동 관련해 금융지주와 시중은행들이 먼저 내놓은 건 기업 지원이다. 우리금융은 수출대금 만기를 연장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하나은행은 11조3000억원 규모의 긴급 금융지원을 결정했다. KB금융과 신한금융도 피해가 예상되는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을 위한 금융지원 방안을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유가 인버스 등 관련 상품 모니터링도 가동했다.
환율 리스크 악몽 재현?…장기화 시 RWA 악화
금융지주사와 시중은행들은 중동발 리스크가 장기화할 가능성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 단기전으로 끝날 경우에는 기업 지원을 검토하는 선에서 마무리되겠지만, 예상보다 길어질 경우 또다시 원·달러 환율이 가파르게 오를 수 있고 이로 인해 금융사들 건전성이 악화할 수 있어서다.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1400원대에서 거래됐던 올해 1분기 말 기준 국내 4대 금융지주(KB금융·신한금융·하나금융·우리금융)의 위험가중자산(RWA)은 총 1209조7000억원으로 1년 전보다 약 54조원 증가했다. RWA가 오르면 금융사 자본적정성 지표인 보통주자본비율(CET1)은 떨어진다. 금융권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이 10원 오를 때마다 CET1이 0.01~0.03%포인트 하락한다.
외환거래 손실도 우려해야 한다. 외환거래 손익은 달러·엔 등 외화로 투자했던 자산을 회수하거나 외화로 빌린 부채를 상환할 때 발생한다.
국내 4대 시중은행들은 지난해 환율 변동으로 인한 외환거래 손실을 이미 경험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불확실성이 증가했는데 여기에 국내 정국 불안까지 겹치면서 원화값이 2023년 12월 대비 지난해 12월 200원 가까이 떨어진 게 문제였다. 금융감독원 금융정보통계시스템에 따르면 4대 시중은행 합산 손실 규모는 8239억원. 4대 시중은행들이 외환거래 손실을 기록한 건 13년 만이다.
김호정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지난 19일 미국이 중동 분쟁에 개입할 가능성이 제기된 것만으로도 달러당 10.8원이 올랐고 현재는 미국이 개입한 상태"라면서 "이후 예측 결과 원달러환율은 최대 1460원 수준까지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유승민 삼성증권 연구원은 "분쟁이 장기화되거나 전면전으로 확전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아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인 수준일 것"이라면서도 "예상과 달리 전쟁이 장기화하고 협상이 실패하면 금융시장은 패닉에 빠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상훈 KB증권 연구원은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로 안전자산 선호도가 올라 달러는 강세, 원화는 약세를 보일 수 있다"면서 "달러당 1352원까지 빠르게 떨어진 원달러환율은 달러당 1400원으로 반등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