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기차 수요부진의 이유를 살펴보면 충전 문제도 있습니다. 전기차 충전시간은 내연기관차 주유에 비해 오래 걸립니다. 또 전기차 충전 인프라도 주유소만큼 잘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도 방해물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배터리 업계는 음극재를 활용, 충전 속도를 대폭 줄이고 배터리 용량을 늘리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기술이 바로 '실리콘 음극재'인데요. 실리콘 음극재가 무엇이고, 어느 수준까지 개발됐는지 살펴볼게요.
실리콘 음극재, 충전속도·주행거리 혁신 몰고온다
그동안 배터리 업계는 주행거리 향상을 위해 양극재에 니켈 함량을 높이는 방법을 사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양극재 소재 변화를 통한 배터리 성능 향상은 이제 한계에 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배터리 업계는 또 다른 배터리 소재인 음극재에 주목하고 음극재에 보다 리튬이온을 많이 저장할 수 있는 기술 개발에 돌입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음극재의 새로운 소재로 실리콘 주목받고 있습니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양극재에서 나온 리튬이온을 음극재가 저장한 후 다시 방출하면서 전기 에너지를 생산하는 원리인데요. 리튬이온을 더 많이, 빠르게 저장하고 방출할수록 에너지 밀도를 높이고 충전 속도를 높일 수 있죠. 또 음극재가 리튬이온을 저장할 때 배터리 구조 변화와 다른 소재와의 반응을 막아 배터리 안정성과 수명을 보호해야 합니다.
현재 생산되는 음극재의 핵심 원재료는 연필심의 원료로 알려진 흑연인데요. 흑연이 음극재 핵심 원료가 된 이유는 리튬이온을 안정적으로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인데요. 흑연은 탄소 6개가 모인 육각형 모양의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때 흑연이 리튬이온을 구조층 사이사이에 안정적으로 저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전기차가 고성능화되면서 흑연 대신 실리콘을 사용한 음극재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실리콘은 원자 1개당 리튬이온 4.4개를 저장할 수 있습니다. 이 덕분에 실리콘 음극재는 단위 무게당 용량이 흑연 기반 음극재보다 10배 이상 높습니다. 이는 배터리 밀도와 용량의 증가로 이어지는데요. 배터리 밀도와 용량이 늘어나면 충전 시간이 대폭 짧아지고 주행 거리도 길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 흑연의 대부분이 중국에서 생산·제련되고 있는 탓에 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현재 중국은 전 세계 흑연 생산량의 80%를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실리콘은 지구상에 풍부하게 분포해 있고, 환경오염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실리콘 음극재를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요. 사실 실리콘 음극재도 단점은 있습니다. 바로 가격이 비싸고, 충·방전을 반복하면 부피가 팽창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또 실리콘 음극재는 흑연계 음극재보다 초기 충·방전 효율이 낮다는 점도 단점으로 꼽힙니다. 초기 충·방전 효율이란 배터리 첫 충전과 방전 후 실제 사용 가능한 배터리 용량이 얼마나 남는지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1000mAh(밀리암페어시) 용량의 배터리 초기 충·방전 효율이 90%라면 이 배터리는 첫 충·방전 후 실제로는 900mAh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현재 흑연계 음극재의 충·방전 효율은 90% 이상인 데 비해, 실리콘 음극재는 80%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흑연계 음극재에 실리콘을 4~5% 정도 첨가하는 구조로 활용되고 있는데요. 문제는 이 과정에서 비용이 크게 증가한다는 겁니다. 100% 실리콘만으로 이뤄진 음극재는 아직 개발 중으로, 상용화까진 다소 시일이 걸릴 전망입니다. 실리콘 팽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 개발이 관건이죠.
현재 상용화된 실리콘 음극재 종류로는 실리콘산화물(SiOx)과 실리콘 탄소 복합체(Si-C)가 있습니다. SiOx는 실리콘 입자를 산화실리콘으로 코팅하는 방식으로 만듭니다. SiC보다 가공 난이도가 높고 단가가 비싸지만 입자 크기가 SiC에 비해 10배 이상 작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입자 크기가 작으면 실리콘 팽창도 역시 줄어들게 됩니다.
SiC는 실리콘에 탄소를 기계적으로 결합해 만든 소재입니다. SiOx 대비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생산성이 좋죠. 다른 소재들에 비해 초기 충·방전 효율이 높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SiOx 대비 팽창도를 잡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운 점으로 꼽히죠.
'무주공산' 실리콘 음극재 시장…누가 승기 잡을까
실리콘 음극재가 미래 배터리 소재로 주목받자 여러 업체가 개발에 나섰는데요. 국내에선 대주전자재료가 처음으로 SiOx 실리콘 음극재를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대주전자재료는 현재 3000톤(t)인 실리콘 음극재 생산 능력을 2025년 2만t까지 늘릴 계획입니다.
포스코그룹은 포스코퓨처엠을 중심으로 오는 2026년까지 음극재 생산량을 6000t까지 늘릴 예정입니다. 또 포스코홀딩스 자회사인 포스코실리콘솔루션도 2025년까지 3000억원을 투자해 포항 영일만산업단지에 연산 5000t 규모의 실리콘 음극재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죠.
SK그룹도 실리콘 음극재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SK머티리얼즈그룹14는 지난 4월 경북 상주에 연간 2000t 규모 실리콘 음극재 공장을 완공했습니다. SK머티리얼즈그룹14는 SK머티리얼즈가 지난 2021년 실리콘 음극재 사업 진출을 위해 미국 배터리 소재 기술 기업 그룹14와 손잡고 세운 합작사인데요. 이 공장은 추가 증설을 통해 2025년까지 생산량을 연산 1만t까지 늘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LG화학은 실리콘 100% 음극재인 '퓨어 실리콘'을 개발 중입니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은 지난해 2월 성장 전략 발표에서 퓨어 실리콘을 핵심 개발 과제로 선정했습니다. 만약 LG화학이 퓨어 실리콘 개발에 성공한다면 배터리 성능을 대폭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새로 음극재 사업에 나선 업체들도 있습니다. 엘앤에프는 지난달 일본 화학사 미쯔비시 케미칼과 '차세대 음극재 사업 업무협약'을 체결했습니다. 기존 양극재에서 나아가 음극재까지 사업 범위를 넓히겠다는 구상이죠.
롯데케미칼의 동박 사업 계열사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도 실리콘 음극재 기술을 보유한 프랑스 스타트업인 엔와이어즈(Enwires)와 지분투자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회사는 이번 지분 투자를 바탕으로 향후 고성능 실리콘 음극재를 대량 생산할 계획이죠. 향후 음극재 핵심 소재인 동박 사업과의 시너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