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 '큰손'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자들이 2040년까지 넷제로(Net zero·탄소중립)를 달성하기 위해 투자기업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주주관여가 필요하다는 조언이 나왔다. 이를 위해 의결권 행사를 넘어 주주로서 기후 주주제안을 직접 할 수 있도록 상법이나 정관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다만 국민연금 측에서는 주주제안을 위해선 '10%룰' 적용 등 법률적 조치를 선제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계에서는 중견·중소기업을 중심으로 급진적인 넷제로 추진이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전했다.
18일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과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은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민연금 2040 넷제로 달성방안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해외연기금 넷제로 추진동향, 국민연금의 넷제로 달성 방안과 기관투자자의 기후 주주제안 활성화 방안 등이 논의됐다.
한정애 의원은 개회사를 통해 "국민연금이 2021년 탈석탄을 선언했지만 관련 기준이나 가이드라인 조차도 마련해 놓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며 "국민연금이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을 위해 주주로서 역할을 해야한다"고 밝혔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국민연금이 투자한 포트폴리오 내 온실가스 배출량 공시기업이 배출한 탄소량은 2710만3018톤에 달한다. 이 수치가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국민연금이 직접 온실가스를 배출한 건 아니지만, 연금의 금융투자 과정에서 기업이 배출한 것이란 의미에서 '금융배출량'이라고 표현한다.
국민연금의 포트폴리오에서 국내 주식 비중은 15%인데 탄소배출량 공개 대상에는 국내 보통주 312곳만 포함됐다.
이날 주제발표를 맡은 김태한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수석연구원은 "국민연금이 넷제로 달성방안을 수립하기 위해 국내 기업의 탄소배출 수준이 얼마인지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이 시작점"이라며 "이번에 공개한 것보다 세부적인 금융배출량을 산정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국민연금의 금융배출량 80%이상을 차지하는 업종은 에너지·소재부문이다. 상위 10개 기업은 △한국전력공사 △포스코홀딩스 △삼성전자 △에스오일 △LG화학 △대한항공 △롯데케미칼 △쌍용이앤이 △SK하이닉스 △고려아연이다.
김 연구원은 국민연금의 금융배출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투자 배제보다는 적극적인 주주활동을 통한 경영전략 전환 유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을 한번에 빼면 시장에 큰 충격이 오기 때문에 연금이 대부분 산업 섹터에 투자배제를 하긴 쉽지 않다"며 "유일한 방안은 적극적인 주주제안을 통해 기업이 기후리스크를 관리하게 유도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기업가치를 올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자들이 적극적으로 기후 주주제안을 할 수 있도록 주주제안의 문턱을 낮출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미국에서는 석유회사인 필립스나 엑손모빌, JP모간, 시티은행 등의 회사에서 기관투자자를 중심으로 기후 관련 주주제안에 이뤄지고 있다. 일본에서도 미즈호, MUFG, 스미토모상사 등에 파리협정 부합 경영전략을 수립하라는 주주제안이 이뤄졌다.
윤세종 플랜1.5 변호사는 "우리나라에서는 기후주주제안 사례가 없는데 그 배경은 법에 있다"며 "회사 존폐에 준하는 아주 중대한 사항만 표결 대상이 되며 주주제안을 하려면 상장사 기준 0.5%의 지분을 6개월 이상 갖고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1조원 시가총액 규모의 상장사에 주주제안을 하려면 50억원에 달하는 지분을 보유해야 하는 셈이다.
윤 변호사는 "정관을 통해 '기후변화 리스크에 관해 주주들이 제안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을 수 있다"며 "권고적 주주주제안 입법 시도도 과거에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혹은 일본 사례처럼 여러 기관 투자자들이 연대를 통해 시도를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반면 국민연금 측에서는 기후 주주제안 등 적극적 의결권을 행사하기 위해선 10%룰 등 법률적 문제를 선제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원종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상근전문위원은 패널토론에서 "국민연금은 대주주이지만 회사가 내건 안건에 대해 반대한다면 100전 99패의 결과가 나온다"며 "대주주라고 하더라도 소수주주의 일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국민연금은 탈석탄을 선언했는데, 수탁자 책임을 위해 수탁자들의 공감대를 살 수 있는지도 문제"라며 "석탄생산, 석탄발전을 한 기업 전부 뺄 것인지, 석탄을 얼마나 쓴 기업들을 제외할 것인지 등 기준에 관한 고민을 전체 가입자들에게 어떻게 설득하는지가 과제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원 전문위원은 "자본시장법상 투자목적이 '경영참여'라면 매매 차익을 회사에 돌려줘야하는 의무가 생긴다"며 "즉 저희가 경영참여 주주활동을 하는 순간 이익을 반환해야 한다.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주주제안을 할 수 있도록 보유 비중 등 요건을 변경해줬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10% 이상 지분을 보유한 주요주주는 6개월 이내 짧은 기간의 단기매매 차익을 거둘 경우, 얻은 차익을 기업에 반납할 의무를 갖는다. 이른바 '10%룰'로 불린다. 다만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기금은 투자목적이 '일반투자'이면 10%룰을 적용받지 않는다.
재계에서는 탈석탄 추진 속도에 우려를 표했다. 손석호 한국경영자총협회 사회정책팀장은 패널토론에서 "선도기업들이 공급망 내에서 자체적 노력을 하고 있지만 중견·중소기업의 경우 인프라 구축 등 경영 추진 비용이 만만치 않아 수년 안에 해결되기 어렵다"고 전했다.
손 팀장은 "기업 제반여건을 고려할때 2040넷제로 방향은 공감하지만 속도엔 의문이 간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민연금이 넷제로 탈석탄을 선언했을 때도 한국전력에서는 불안감이 컸다. 석탄 활용 비중이 70%인데 50%이하로 떨어뜨리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라며 "큰손인 국민연금이 투자를 철회하거나 비중을 줄이는 등 실제 시행으로 이어진다면 자금 조달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