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은행과 증권사 간 영역 다툼이 치열하다. 저금리 기조가 장기화하는 와중에 이른바 동학개미운동을 계기로 자본시장으로 머니무브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어서다. 기회를 잡은 증권사들은 공격의 고삐를 죄고 있고, 은행들은 방어에 여념이 없다. 주요 쟁점들을 짚어봤다. [편집자]
강신애 기자가 본 증권: 직접 투자의 시대
바야흐로 직접 투자의 시대입니다. 요즘 투자자들은 자산을 금융회사에 맡기기보다는 어떤 투자처가 좋은지 비교하고 분석해 직접 자산을 운용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지요. 직접 투자의 인기에 따라 자본시장으로 자금이동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습니다.
직접 투자 트렌드를 이끈 것은 코로나19입니다. 국내 자본시장의 분위기는 코로나19 대유행의 전과 후로 확연히 달라지고 있는데요. 코로나19 확산 초기인 지난해 3월 글로벌 증시가 경제위기급 충격을 받은 이후 증시가 꾸준히 우상향하면서 주식과 펀드, 상장지수펀드(ETF) 등에 대한 투자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겁니다.
실제로 금융투자업계로 자금 유입세는 매우 쉽게 관찰됩니다. 주식 투자의 대기성 자금인 투자자예탁금과 활동계좌수가 지난해를 기점으로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 대표적입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활동계좌수는 이달 들어 5000만개를 훌쩍 뛰어넘으며 국민 1인당 1계좌 시대를 열었습니다. 투자자예탁금은 70조원을 넘나들며 고공행진 중입니다. 요즘 대세로 꼽히는 금융상품인 상장지수펀드(ETF)의 순자산총액은 62조원에 육박하는 등 역대 최대 수준입니다.
그러자 증권가는 쾌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간 기업금융에 밀려 찬밥 취급을 받던 리테일과 자산관리(WM) 부문이 다시 효자로 급부상하며 역대 최대 실적을 견인하고 있어서입니다.
덩치가 커진 증권사들은 최근 공세를 더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동학개미'로 불리는 국내 개인 투자자를 장기 고객군으로 유치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지요.
국내 주식거래 수수료 전액 무료는 물론 해외 주식 투자 시 환율 우대 등 앞다퉈 다양한 당근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출혈경쟁'이라는 비판도 나오긴 하지만 증권사들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응수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땐 후자의 선택이 맞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데요.
특히 최근 잇단 개인형 퇴직연금(IRP) 수수료 무료 선언은 회심의 일격과도 같았습니다. 기존 단순 주식 투자 플랫폼에서 변모해 양질의 자산관리자로서 고객을 끌어모으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되기 때문입니다.
금융투자업계 고위 관계자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평가를 내놨습니다. 기존에 직접 투자에 대해 막연하게만 생각하던 투자자들이 금리 플러스 알파의 수익을 내는 경험을 쌓아가면서 이제 예·적금만큼이나 익숙한 자산관리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진단입니다.
투자자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직접 투자의 매력을 알게 된 이상 예·적금 위주의 자산관리 시대로 회귀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데요. 투자 패러다임의 변화가 금융권의 지형 변화로 이어질지도 주목됩니다.
김미리내 기자가 본 은행 : 미래 생존 갈림길
지난해 이후 주식투자 열풍은 은행권에도 큰 숙제를 던졌습니다.
그동안 금융의 주인공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은행들이 잇달아 증권 영역을 노크하면서 새로 주연급으로 떠오른 신예를 질시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은행권은 질시가 아니라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 금융 패권을 놓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의 발로로 보고 있습니다.
은행은 올해 사상 최대 이익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대출이 늘었고, 예금 등 수신 규모도 늘었습니다. 퇴직연금 시장에서 증권행 머니무브가 늘었다고 해도 은행도 계속 몸집을 불리고 있습니다.
다만 이상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요구불예금의 급증이 대표적인 사례인데요. 요구불예금은 말 그대로 예금자가 요구하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예금으로 입출금식통장에 들어있는 돈 등을 말합니다. 예금이나 적금처럼 은행에 묶인 돈이 아닙니다.
요구불예금은 매년 10% 안팎으로 꾸준히 늘고 있는데요. 그런데 작년엔 전년과 비교해 32%, 74조원이 급증했습니다. 올해도 3개월 만에 지난해 증가액의 3분의 1에 달하는 24조원이 늘었는데요. 2019년 1년간 늘어난 금액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은행들의 위기감과 조바심은 여기서 나옵니다. 급증한 요구불예금은 은행이 아닌 증권이나 부동산으로 이동하기 위한 '투자대기성' 자금이기 때문입니다. 증권사 예탁금 규모가 크게 늘어난 것도 같은 연장선에 있습니다.
코로나19와 저금리 장기화가 맞물리면서 주식시장으로 대거 자금이 이동하고 있지만 은행들은 아직까지 이 흐름을 막을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은행권 관계자들은 "답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바닥까지 추락한 수익률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증권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은행 직원들마저 퇴직연금을 증권사로 옮겼다는 얘기도 왕왕 나올 정도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이동과 변화가 반짝현상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은행 텃밭으로 불렸던 종합자산관리계좌(ISA) 가입자 수만 봐도 소비자의 변심(變心)을 확연히 보여줍니다.
ISA는 한 계좌 내에서 예·적금과 펀드, 리츠, 주식 등 다양한 상품에 투자할 수 있는 절세계좌로 서민형 만능통장으로 불립니다. 기존엔 예·적금 상품을 기본으로 한 은행 고객이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올해 2월 가입자가 자유롭게 주식을 매매할 수 있는 중개형 ISA가 등장하면서 흐름이 확 바뀝니다. 비중이 채 10%도 안되던 증권사 가입자가 중개형 ISA를 도입한지 4개월 만에 86만명 넘게 늘어난 겁니다. 신탁과 일임형까지 포함하면 총 95만명에 달해 가입자 기준 시장점유율이 48.8%까지 치솟았습니다.
한때 200만명에 달했던 은행 가입자는 같은 기간 99만명으로 줄었습니다. 은행 가입자의 절반가량이 증권사로 넘어가면서 간신히 50% 수준을 지킨 겁니다.
당장 예금이 줄거나 수익이 줄어든 건 아니지만 은행들이 위기감을 느낄만 합니다. ETF 실시간 매매와 투자일임업을 허용해달라고 요구도 같은 맥락인데요. 금융권의 맏형인 은행과 동생격인 증권사간 영역다툼이 갈수록 더 심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은행-증권 '적군이자 전우'…상생은
은행과 증권이 마냥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건 아닙니다. 생존을 위해 먹거리를 놓고 치열한 영역다툼을 벌이고 있지만 한 식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적군이자 전우이기도 한 아이러니한 관계죠.
실제 금융지주 내 증권을 비롯한 비은행 계열사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협업을 통한 시너지가 점점 더 강조되고 있습니다. 신한지주와 KB금융 등 주요 금융그룹들은 은행과 증권의 주요 임원직을 겸직하게 하는 매트릭스 구조를 통해 시너지를 내는 방안들을 생각해 왔습니다.
딜(Deal)에 강한 증권 IB(투자은행) 부문과 은행이 대규모 개발사업에 공동 PF(프로젝트파이낸싱) 주관사로 참여해 금융주관과 리스크관리(신용공여)까지 함께하는 등 윈윈(Win-Win)할 수 있는 영역들을 찾고 넓혀가는 식입니다.
다만 금융지주 내 은행과 증권 부문의 더 효율적인 협업과 시너지를 위해선 종합적인 중간 진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금융지주 체계가 정착된지 20여년이 지난 만큼 제도적인 개선안을 검토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경쟁보다는 상생 방안을 찾는 데 더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영역다툼으로 업권 간 경계가 허물어질 경우 자칫 금융소비자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객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지 말고 목표 고객군을 차별화해 은행, 증권별로 서비스를 특화하는 방향으로 집중하자는 겁니다.
금융당국 한 고위관계자는 기업 투자자와 개인 투자자로 고객을 차별화하는 것도 은행과 증권업이 서로 상생하며 발전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기업 등 생산자 중심 금융은 증권사가, 개인 등 소비자 중심 금융은 은행이 전담하는 방식입니다.
지주사 중심의 상품 협업의 범위를 더욱 늘리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쉽지 않은 길입니다. 이제 막 크게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증권업도, 앞으로는 보유 고객들을 빼앗길 일만 남았을까 노심초사하는 은행도 미래 패권을 놓고 불확실한 외나무다리에 서 있습니다. 그것도 2인3각으로 묶인 발로 말입니다. 옆 라인에서 달리고 있는 빅테크에 맞서 이들이 어깨동무하고 발맞춰 갈지, 서로 다른 방향을 내딛는 발에 힘을 주며 갈지 지켜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