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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숨겨진 재벌가]책머리에

  • 2014.06.10(화) 11:18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누구나 다 아는 나라가 된 대한민국. 강력한 국가 정체성과 단일민족이라는 응집력을 그 기반으로 한다. 그 중심에는 혈연에 뿌리를 둔 재벌이 있다. 뒤늦게 산업화에 뛰어들어 압축 성장을 이끌어냈고, 그 과정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은 매우 중요했고, 창업주가 맨손으로 대그룹을 일으키는 역사의 현장에는 어김없이 형제와 자녀가 함께 있었다.
 

‘한국의 숨겨진 재벌가’는 그 가족들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과 같이 대통(大統)을 이은 일가들의 얘기가 아니다. 비록 본류(本流)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피는 못 속인다’는 말처럼 어느덧 산업계의 신주류(新主流)로 성장하고 있는 ‘한 핏줄’을 조명하고 있다. 

집필 동기는 지난 반세기 나라의 성장과 궤를 같이하며 A4 한 장으로 그리기는 어림없을 정도로 2세, 3세, 4세로 뻗어 내려간 재벌가(家)의 가계도를 보면서 생긴 방계(傍系) 집안에 대한 궁금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창업주의 DNA를 가진 후손이나 혼맥으로 얽힌 일가가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경영자의 길을 엿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적통만을 비중 있게, 시도 때도 없이 다루는 풍토에서, 그 식상함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적 욕구도 컸다.

창업주의 형제와 자녀, 처가, 외가, 사돈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어떻게 기업을 키우고 어떤 시련을 겪었는지, 그리고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담담하게 짚어봤다. 본가(本家)의 대물림이 진행되는 한 켠에서 방계가의 2세, 3세는 어떻게 가업을 승계해왔고, 물려받은 부(富)를 잘 관리하고 있는지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방계가를 다뤘지만 CJ, 신세계, 한솔,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 KCC, 한라, 한진중공업과 같이 일찌감치 재계 지도를 바꿔놓은 대단히 크고 부유한 그룹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김연아를 모델로 쓴 광고가 수십 개인데, 사람들은 어떤 제품을 광고한 건지 기억을 잘 못한다. 이런 메시지의 홍수 속에서 차별화 포인트를 갖고자 했다. 일양화학, 선진종합, 래딕스, 진명기업, 고려디자인, 한국파파존스, 후니드, 에이치플러스, 알토, 태인 등 이름조차 낯설거나  ‘이곳이 재벌가였나?’할 정도의 방계그룹들에 초점을 맞췄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분가(分家)해 한 편의 기업드라마 같은 홀로서기 과정을 보여주는 창업주의 늦둥이 막내아들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난 뒤 은둔의 경영자로 지내고 있지만 아들을 성공한 경영자로 만들기 위해 총수 동생 못지않은 정성을 기울이는 재벌가 장남을 만날 수 있다. ▲재벌 반열에 올랐지만 몰락한 비운의 일가에서 딸이 재기의 싹을 틔우고 ▲집안에 들어앉아 숙명과도 같은 그림자의 삶을 살던 안방마님이 자리를 털고 나오고 ▲‘왕자’들 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보여줬던 사위가 중견기업의 오너로 변신한 스토리를 지켜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본가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TV·냉장고 등 가전제품에 들어갈 부품을 공급하고, 빌딩사옥의 경비와 미화 용역을 맡는가 하면, 광고대행을 하고, 직원식당을 운영하며, 직원 유니폼을 제작하고 있다. 배의 선실에 들어갈 가구를 납품하고, 필요한 인력을 파견하고 있다. 

방계 일가에서 보면 마뜩하지 않은 일일 수 있다. 그간 조용히 지내왔고, 그래서 무엇이든 언급되는 것 자체가 내심 불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재벌가라는 이유만으로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숨어있는 호기심과 부러움 등 다양한 감정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재벌빵집’이다 ‘경제민주화’다 해서 재벌에 대한 세상 민심이 사나워진 마당에 괜히 엉뚱하게 시샘이나 받지 않을까 걱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일가의 껄끄러운 부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전혀 아니고, 정색하고 쓴 글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전달하고자 할 따름이다. 사업적으로 손을 맞잡고 있는 부분도 남보다 핏줄이 더 당기는 게 인지상정이고, 방계기업의 경쟁력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이상 남들보다 특혜를 받고 있는 양 막연히 색안경을 끼고 볼 수만은 없다.

덧붙이자면, 본가의 그늘에 가려 혹은 외부 노출을 꺼리는 오너 개인적인 성향 등 이런저런 이유로 어느 순간 뚝 끊겨버린 방계가의 맥을 다시 잇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체계적인 조명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방계가 오너들의 집안, 혼맥, 2세 등 개인적인 면모에만 눈을 고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경영자로서 기업을 꾸려가는 모습과 회사는 건실한지, 또 벌이는 괜찮은지 재무제표를 짚어보는 데도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엄연히 재벌가의 일원이지만 50만 개 국내 기업체의 하나 정도로 치부되고 있는 현실에서 새로운 존재감을 불어넣으려는 차원이다.

기업 얘기인만큼, 심각한 취업난 속에서도 대기업으로만 몰려드는 취업 준비생들에게 작지만 안정적이고 탄탄한 재벌가의 기업들을 보여줌으로써, 대기업 중심의 ‘편식’에서 좀 더 다양하고 풍부한 ‘균형 식단’을 만들어주기 위한 목적도 있다. 무차별적 정보 속에 보다 일목요연한 맞춤 정보가 필요한 기업체나 금융기관, 투자회사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2013년 2월 초쯤에 기획해서 2013년 6월 1일 인터넷 경제 언론 ‘비즈니스워치(www.bizwatch.co.kr)’ 창간에 맞춰 필자가 ‘방계가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연재하기 시작한 기사들을 다듬어 묶은 것이다. 우선 1차로 삼성, 현대, SK, LG 등 한국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의 20개 방계그룹을 대상으로 했다. 

연재한 지 1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자 그동안 방계기업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출간 시기도 기업들의 결산시즌과 맞물려 있어 자연스럽게 업데이트 과정을 거쳤다. 따라서 이 책은 기존 연재물보다 시의성과 충실성 측면에서 보다 상세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독자들에게 과거가 아닌 오늘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한국의 숨겨진 재벌가’는 창업주의 혈연관계 별로 주제를 나눈 총 5장으로 구성되었고, 각 장마다 3~5개의 방계기업을 묶어 서술했다. 각 장의 시작에는 주제의 대강을 요약하는 내용을 넣었다. 뒤이어 나오는 방계가에 대한 독자들의 사전 이해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이 책의 각 장이나 이를 구성하는 방계기업은 독립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 반드시 책의 순서에 따라 읽을 필요는 없다. 독자들이 흥미를 갖고 있는 부문을 임의로 골라 읽어도 무방하다. 당연히 필자는 각각의 방계기업 모두가 독자들을 매료시킬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2014년 봄

신 성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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