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간 경영권 다툼을 벌이는 롯데그룹이 거센 역풍에 직면하고 있다. 한국 롯데를 지배하는 곳이 일본 롯데홀딩스라는 점이 부각되며 기업의 국적 논란이 제기되고 정치권에선 "경제살리기에 앞장서야 할 재벌이 찬물을 끼얹었다"며 질타가 쏟아졌다. 국세청은 롯데그룹의 광고회사인 대홍기획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형제간 다툼에 국민적 비난여론까지 더해져 롯대그룹이 내우외환의 처지에 몰렸다. [편집자]
이번 사태에서 국민정서를 건드린 건 역설적이게도 지난달 30일 신동주 롯데홀딩스 전 부회장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려고 나선 방송 인터뷰가 계기가 됐다. 당시 신 전 부회장은 '동생을 해임한다'는 내용의 아버지 서명이 담긴 문서를 공개했다. 그런데 방송을 본 시청자들은 롯데가(家)의 장남이 우리말이 아닌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에 의아해했다.
다음날 공개된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과 신 전 부회장의 대화내용은 끓는 물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다.
동생(신동빈)을 그만두게 한 것은 아버지(신격호)의 뜻이라는 점을 입증하려고 신 전 부회장이 제시한 음성녹음 파일에서 부자(신격호·신동주)는 시종일관 일본어로 대화를 나눴다. 대화 속에서 동생인 신 회장은 일본 이름인 '아키오(昭夫)'로 지칭됐고 아버지 신 총괄회장은 '오또상(おとうさん·일본어로 아버지)'으로 불렸다.
이 때를 기점으로 롯데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정서가 급격히 싸늘해졌다. 시청자들은 "롯데가 껍데기만 한국기업 아니냐", "한국에서 돈을 벌어 일본으로 가져가는 기업" 등 격앙된 반응을 나타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롯데를 일본과 가깝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이 방송을 본 뒤 '정말 그렇구나'라고 느낀 것"이라며 "형과 동생,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국민정서를 건드린 게 롯데로선 뼈아픈 일이 됐다"고 말했다.
신 전 부회장이 지난 2일 한국인 부인 조은주 씨와 함께 방송에 등장해 우리말로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라고 머리를 숙였지만 한번 각인된 '롯데=일본기업'이라는 인상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 신동주 롯데홀딩스 전 부회장과 부인 조은주 씨는 방송 인터뷰에서 "국민 여러분께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지만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KBS 화면 캡처) |
다음날 경영권 다툼의 당사자이자 동생인 신 회장이 김포공항에서 언론 앞에 섰을 때도 당혹감을 나타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신 회장은 한국어를 사용했지만 일본어 억양을 지우지 못했다. 그가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허리 숙여 사과한 것을 두고도 일본식 인사법 '사이케이레이(최경례·最敬禮)'라며 못마땅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한술 더 떠 일본 네티즌들은 "롯데는 한국기업"이라는 신 회장의 언급을 두고 롯데 불매운동을 얘기하고 있다.
기업위기관리 전문가인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는 "평소 대중과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던 두 형제가 갑작스럽게 나타나 기대했던 것과 다른 모습을 보였을 때 국민들이 받는 충격을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며 "법률적 문제와 가족간 문제로 여긴 채 국민정서를 읽지 못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