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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스토리]'계산된' 현대HCN 매각법 

  • 2020.03.31(화) 16:16

현대백화점, 대형 M&A와 신사업 강조…주주 달래기
인허가 이슈·매각 지연시 매각 철회…실패 명분 확보

현대백화점그룹이 현대HCN의 '방송(SO)·통신사업 부문' 매각에 나섰습니다. 사실 그동안 현대HCN 매각은 수차례 언급된 이야기긴 합니다. 작년 말에는 현대백화점그룹이 공식적으로 "매각 계획이 없다"라고 했을 정도로 현대HCN 매각설은 '구문(舊聞)'이기도 합니다. 그랬던 현대백화점그룹이 불과 4개월여 만에 현대HCN 매각을 공식화하고 나섰습니다. 왜일까요?

현대HCN은 종합유선방송국(SO·System Operator)입니다. SO는 케이블TV 방송국을 소유, 독점사업구역 내 가입자에게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받아 공급합니다.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영하기도 합니다. 이사갈 때마다 해당 지역 케이블TV 업체가 자사 케이블 가입을 권유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 유료방송시장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IP)TV가 급속도로 확산하기 시작한 겁니다. IPTV는 SK텔레콤, LG유플러스, KT 등 통신사업자들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설치하면서 결합상품 등으로 자사 IPTV 가입을 유도한 결과 유료방송 트렌드가 기존 케이블TV에서 IPTV로 옮겨갔습니다. 이에 따라 케이블TV를 운영하던 현대HNC도 사업 재편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국내 유료방송시장 점유율 1위는 KT입니다. LG유플러스와 SK텔레콤이 그 뒤를 쫓고 있는 형국입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국내 유료방송시장 점유율은 80.06%에 달합니다. 나머지를 현대HCN이나 딜라이브, CMB 같은 SO들이 나눠 갖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만큼 통신업체들의 유료방송시장 장악력은 막강합니다.

여기에 이들 상위 3개 업체의 시장점유율이 비슷해진 것도 현대백화점그룹이 현대HNC 매각을 결정하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힙니다. LG유플러스는 CJ헬로를 인수했고, SK텔레콤은 태광그룹의 티브로드를 합병하면서 덩치를 키웠습니다. 점유율 차이가 비슷한 만큼 현대HCN을 가져간다면 단숨에 경쟁에서 앞설 수 있습니다. 업계에서 LG유플러스나 SK텔레콤을 유력한 인수 후보로 꼽는 이유입니다. 

자료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단위 : %).

현대백화점그룹은 지금이 매각 적기라고 봤을 겁니다. 좀 더 비싼 가격에 넘길 수가 있어서입니다. 유료방송의 대세가 이미 IPTV로 넘어간 이상 굳이 SO를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차라리 좋은 값을 받고 파는 것이 상책입니다. 게다가 현대백화점그룹은 최근 면세점 사업 확장에 나섰습니다. 면세점 사업은 실탄이 많이 필요합니다. 이 때문에 매각 대금을 면세점 사업에 투입하지 않겠느냐는 분석도 나옵니다.

이 정도면 현대백화점그룹이 현대HCN을 매물로 내놓을 만한 이유는 충분해 보입니다. 그런데 현대백화점그룹은 현대HCN 매각을 공식화하면서 무척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놨습니다. '조심스러움'이 현대백화점그룹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기업 분위기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발표에는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지분 매각이 성사될 경우 기존 현대HCN이 보유한 현금에 추가 케이블TV 사업 매각 대금까지 활용해 향후 성장성이 높은 신사업이나 대형 M&A를 추진해 나갈 계획" 

"보유하고 있는 현금에, 지분 매각 성사 시 추가 매각 대금까지 활용해 그룹 미래 성장 전략에 부합하는 신사업이나 대형 M&A에 적극 나설 방침"

"현대HCN은 현재 4000억원 가까운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이번 매각 추진을 발표하면서 유독 'M&A'를 강조했습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보입니다. 먼저 실제로 현대백화점그룹이 현대HCN 매각 이후 신사업 관련 M&A를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계속 M&A를 강조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미 큰 그림을 그려두고 스텝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주주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입니다. 현대HCN의 케이블TV사업은 현대백화점그룹 내에서도 알짜로 꼽힙니다. 최근에는 수익성이 소폭 하락했지만 SO들 중에서는 가장 높은 현금창출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게다가 서울 강남, 서초 등 수도권 및 대도시에 가입자가 집중돼 있습니다. SO엔 최적의 조건입니다. 인수 후보자들이 현대HCN에 관심을 가질만한 요인입니다.

이런 사업을 매각하겠다고 나선 만큼 주주들의 입장을 고려치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4000억원에 가까운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라고 밝힌 것도 결코 회사가 어려워서 매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구조 개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매각 대금을 신사업에 투자해 주주가치를 높이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늘 '조심스러운' 현대백화점그룹 입장에서는 당연히 주주들의 반발을 의식했을 겁니다.

"매각 절차에 들어가더라도 진행과정에서 정부 인허가 문제로 매각이 불허 또는 지연되거나, 매각 조건 등이 주주가치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경우 매각을 철회할 방침"

통상 매각을 추진하는 입장에서는 반드시 매각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게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현대백화점그룹은 이번 매각이 정부의 인허가에 막히거나 지연될 경우 단호히 매각 작업을 중단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한마디로 굳이 이번 매각에 목숨 걸지 않겠다는 겁니다. 무척 이례적입니다. 그러면서 현대백화점그룹은 또 주주가치를 언급했습니다. 주주들에게 무리한 매각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셈입니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현대백화점그룹이 KT의 사례를 염두에 둔 발언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KT는 케이블업계 3위인 딜라이브 인수를 위해 실사까지 마쳤지만 국회 등에서 '합산규제'를 이유로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인수가 무산된 바 있습니다. 합산규제는 특정 유료방송 사업자의 가입자 점유율을 IPTV·케이블TV·위성방송 등 전체 유료방송의 33%로 제한하는 것을 말합니다.

합산규제는 이미 일몰된 법안이지만 현재 국회에서는 연장을 논의 중입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사안입니다. 현대HCN의 시장점유율은 4.07%입니다. 국내 유료방송시장 점유율 1위인 KT의 점유율이 31.31%입니다. 합산규제가 연장된다면 KT는 현대HCN 인수전에 뛰어들 수 없습니다. 업계가 현대HCN 인수후보로 LG유플러스와 SK텔레콤을 꼽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단위 : 억원.

현대백화점그룹이 LG유플러스의 CJ헬로 인수 때처럼 매각 기간이 길어지는 것을 우려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매각 과정이 지난해질 경우 현대백화점그룹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당초 대외적으로 주주가치 제고를 내건 만큼 매각 기간이 길어지면 이를 훼손할 수 있다는 게 현대백화점그룹의 판단입니다.

따라서 현대백화점그룹의 이런 발언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분석입니다. 합산규제 법안 기간의 연장 등 인허가 이슈에 영향받지 않고 최대한 빨리, 좋은 가격에 매각하고 싶다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아울러 예상 밖 암초를 만나 매각이 무산되더라도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철회했다는 명분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백화점그룹이 정부와 예비 인수 후보자들에 보내는 일종의 시그널로 보인다"면서 "현재로서는 현대HCN이 매물로서 가치는 충분하다. 다만 매각 과정에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튀어나올 수 있다. 이를 고려해 미리 방어막을 쳐둔 것이 아니겠느냐. M&A를 강조한 것도 주주들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다. 충분히 계산된 발언으로 보인다"라고 말했습니다.

현대백화점은 잃을 것이 없는 매각입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매각 성공을 가정한 다양한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설사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주주가치를 앞세워 책임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뒀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손실은 최소화하는 현대백화점그룹의 기업 문화가 다분히 반영된 셈입니다. 현대백화점그룹의 '조심스러운' 행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관심 있게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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