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유통업계에서 전통적인 경기 대응 공식이 깨지고 있다. 경기 불황기에 강세를 보여야 할 필수 소비재 채널은 주춤한 반면, 사치재를 앞세운 백화점 채널은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했다. 소비의 전체 총량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자산 유무와 소득 수준에 따라 소비 행태가 갈리는 양극화 현상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백화점만 '훨훨'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3월 주요 유통업체 매출 동향'에 따르면, 전체 유통업체 매출은 전년 대비 5.6% 증가했다. 백화점 매출은 전년 대비 14.7% 증가하며 오프라인 유통을 사실상 홀로 이끌었다.
특히 최근 백화점 매출의 구성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까지 실적을 견인한 것은 명품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의류·패션·잡화는 물론 가전·가구까지 판매가 고르게 늘었다. 특정 품목 중심이 아니라 백화점이 소비 전반의 중심이 된 셈이다.
백화점 실적 상승 배경에는 '자산 효과'가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주식과 부동산 등 금융자산 가격이 오르면서 자산 보유층의 소비 여력이 확대됐다. 근로소득이 정체돼도 자산 가치 상승이 소비를 떠받치는 구조가 형성됐다는 의미다. 일부 대기업의 성과급 지급 역시 고가 소비를 자극한 요인으로 거론된다.
여기에 외국인 관광객 증가도 힘을 보탰다. 지난달 BTS 컴백 공연 등의 영향으로 방한 수요가 늘었고, 외국인 소비가 백화점으로 유입되면서 전 상품군의 고른 성장세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지난 3월 방한 외국인은 206만명으로 역대 3월 기준 최대치를 기록했다.
실제로 국내 백화점 56개 점포의 성적표는 눈부시다. 점포당 평균 매출 증가율은 올해 1월 17.4%, 2월 30.1%, 3월 18.8%로 두 자릿수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흐름에 맞춰 백화점업계는 서울 외 지역 백화점에 힘을 주며 공격적인 외형 확대에 나섰다.
롯데백화점은 인천점을, 신세계백화점은 광주점을 차기 '매출 1조 점포'로 키우기 위해 전사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도심형 복합몰 '커넥트 현대'를 부산과 청주에 오픈하며 '지역 랜드마크' 경쟁에 불을 지피고 있다.
필수소비는 가성비로
백화점의 기세와 달리 전통적인 경기 방어 채널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 3월 대형마트 매출은 15.2%, 기업형 슈퍼마켓(SSM)은 8.6% 급감했다. '불황에 강하다'는 편의점조차 2.7% 성장에 그치며 사실상 정체 상태에 빠졌다.
필수소비재 수요 자체가 줄어든 건 아니다. 식품과 생활용품은 생활에 필요한 지출이기 때문이다. 소비 둔화 국면에서 줄어든 것은 소비 자체가 아니라 소비가 이뤄지는 방식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요즘 소비자는 수백만원짜리 명품을 살 때는 과감하게 지갑을 열지만 생필품을 살 때는 단돈 1000원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온라인 쇼핑이 일상화되면서 가격 비교가 쉽고 배송이 빠른 이커머스 플랫폼이 대형마트의 가격 우위를 상당 부분 약화시켰다. 특히 쿠팡의 '로켓프레시', 컬리 '새벽배송' 등 신선식품 배송 체계는 주부층의 발길을 마트에서 온라인으로 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편의점 3사인 GS25, CU, 세븐일레븐의 상황도 녹록지 않다. 과거에는 1인 가구 증가와 근거리 쇼핑 수요를 바탕으로 연 10% 안팎의 성장세를 이어갔다. 하지만 최근에는 물가 상승으로 가격 민감도가 높아지면서 성장세가 눈에 띄게 둔화됐다.
초저가 소비 확산도 또 다른 변수다. 오프라인에서는 5000원 이하 균일가를 앞세운 다이소가 생필품 수요를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 고물가 국면에서 1000~5000원 균일가는 소비자에게 직접적인 매력으로 작용한다.
다이소는 화장품과 패션 카테고리까지 확장하며 대형마트와 편의점을 위협하는 강력한 유통 플랫폼으로 진화했다. 대형마트와 편의점에서도 5000원 이하의 초저가 상품들을 내놓고 있지만, 이미 자리 잡은 다이소의 위치를 넘보기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결국 지금의 유통 시장은 경기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 경기의 방향보다 자산 보유 여부와 가격 민감도가 소비를 더 크게 가르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의 흐름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소비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라며 "백화점은 초프리미엄 전략으로 외형을 키우고, 마트와 편의점은 가격 경쟁력 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양극화 시대가 굳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