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36시간 만에 초고속으로 파산하자 그 배경으로 스마트폰을 통한 예금 인출이 지목됐다. 소비자들간 소식을 전하는 속도가 빨라졌을뿐 아니라 은행 앱으로 예금을 순식간에 빼갔기 때문이다.
디지털 강국인 한국에서는 '스마트폰 뱅크런' 위험이 더 클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금융당국은 금융소비자들의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 국내에서 뱅크런이 일어날 경우 미국처럼 '예금 전액 보호' 조치를 할 수 있는지 검토에 들어갔다.
증가하는 비대면 거래…과거 대비 뱅크런 속도 ↑
16일 금융권에 따르면 전자금융감독규정에 따라 개인고객 기준 국내은행의 인터넷·모바일 뱅킹 1회 이체 한도는 최대 1억원, 1일 이체 한도는 최대 5억원이다. 이는 대면 채널이 없는 카카오·케이·토스뱅크 등 인터넷전문은행은 물론,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주요 시중은행에도 적용된다.
금융당국은 SVB 사태 여파가 국내 시중은행으로 번질 가능성은 작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국내 은행의 모바일 뱅킹 이체 한도도 1일 최대 5억원을 넘고, 스마트폰을 이용한 비대면 거래가 늘어나고 있는 만큼 대응책이 필요하다는 반응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SVB 사태가 유례없이 신속히 파산한 배경에는 기술혁신에 기반한 금융시스템의 변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과거와 달리 스마트폰을 통해 은행 업무가 일반화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정보 전파가 신속하게 이루어지면서 예금인출 등도 빠르게 이뤄져 금융기관의 대응 역시 힘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앞으로도 일부 금융기관의 부실 뉴스가 있으면 언제든지 뱅크런 사태가 재연될 여지가 높다"고 예상했다.
실제 모바일이나 인터넷 등으로 비대면 거래를 하는 금융소비자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행이 홍성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은행에서 비대면 거래(인터넷·모바일·전화 거래)는 전체 거래의 절반을 넘어섰다. 비대면 거래 비율은 2015년 28.8%에서 지난해 51.2%까지 높아졌다.
비대면 거래 중에서도 모바일 거래의 비율이 가장 높다. 스마트폰에 깔린 은행 앱을 통한 '모바일 뱅킹'은 2015년 전체 은행 거래의 11.7% 수준에서 지난해엔 39.7%까지 높아졌다. 짧은 시간 안에 스마트폰으로 은행 앱에 접속해 예금을 인출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은행 지점 직접 방문해 예금을 인출하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내 예금 100% 보호…예금자 보호 한도 상향될까?
이런 뱅크런의 대비책으로 예금자 보호 한도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번 SVB 사태로 시그니처은행이 파산하자 미국 당국은 뱅크 런이 다른 은행들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난 12일 "예금자 보호 한도를 넘더라도 예금 전액을 보장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실제로 미 금융당국은 보호 대상과 한도(최대 25만 달러) 상관없이 예금 전액을 보증하기로 결정했다.
예금자 보호 한도는 금융회사가 파산 등으로 예금을 돌려줄 수 없을 때 예보가 금융회사 대신 지급해주는 최대한도 금액이다. 대부분의 금융사 원금 보장형 상품에 적용된다. 한도는 지난 2001년 1인당 2000만원에서 5000만원으로 오른 이후 20년 넘게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반면 해외 주요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예금자 보호 한도를 상향했다. 미국은 25만달러(약 3억2800만원), 영국은 8만5000파운드(약 1억3400만원), 일본은 1000만엔(약 9800만원)까지 예금자 보호가 적용된다.
정치권에서도 금융 소비자의 불안감을 덜어주기 위해 예금자 보호 한도를 상향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은 지난 14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 대책 회의에서 "미국 SVB의 초고속 뱅크런은 한국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라며 "예금자들이 불안하게 되면 은행 경영 또한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소비자의 불안을 해소하고 그간의 물가 인상도 반영하기 위해 예금자 보호 금액을 5000만원에서 1억원 정도로 상향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 또한 최근 내부 회의에서 국내 금융사에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예금 전액을 보호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가능한지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최근에는 모바일 뱅크 등이 활성화되면서 예금이 움직이는 속도가 과거와는 상당히 많이 달라졌다"면서 "지금은 시중에 유동성 문제가 없지만 만일 SVB 사태처럼 한 번에 많은 자금이 유출되면 그런 상황을 버텨낼 은행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사태에 대비하고자 미국처럼 전액 보호가 가능한지 알아보라고 지시한 것"이라고 밝혔다.
예금자 보호 한도가 장기간 동결되면서 한도를 초과한 예금의 규모도 늘어나고 있다. 에금보험공사가 김희곤 국민의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5000만원을 초과하는 예금은 2017년 말에는 724조3000억원에서 작년 6월에는 1152조7000억원(65.7%)까지 늘어났다.
이에 금융위원회와 예금보험공사 등은 예금자 보호 한도 개선 방안을 논의 중이다. 예금보험공사는 지난해 3월부터 오는 8월까지 금융위원회와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적정 보호 한도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예금 전액 보호나 한도 상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도 상승시 금융회사가 나눠 내는 예금보험료를 높여야 하는데 이렇게 늘어난 보험료가 결국 대출금리 인상 혹은 예금금리 인하 등의 방식으로 금융소비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홍기훈 홍익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모든 것을 정부에서 해결하게 된다면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다"며 "정부에서 예금 전액 보증을 해준다면 은행들은 책임을 안 져도 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자산 확대를 위해 더욱 공격적으로 나올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