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사업 방향과 조직 운영 색깔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정기 인사다. 올해도 정기 인사철을 맞아 어김없이 각 기업별로 작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경기침체가 이어지고 주력사업들의 경쟁력이 한계를 맞고 있다는 우려가 대두되는 가운데 올해 대기업들의 정기 인사에 담긴 특징을 정리해본다. [편집자]
주력사업들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평가들이 나오는 가운데 대기업들이 새로운 먹거리 찾기에 팔을 걷어 붙였다. 특히 올해 정기 인사에서는 이같은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신사업 진출을 선언하거나 기존에 진출한 사업의 성장속도를 높이기 위해 전열을 정비하는 모습이다.
올해 대규모 빅딜 등 사업재편에 돌입한 기업들은 내년에도 끊임없이 변화를 도모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그만큼 대내외적인 상황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정기 인사에서 세대교체를 단행한 것도 이같은 변화를 위한 포석이란 해석이다. 특히 오너일가들이 신사업을 직접 맡아 추진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 삼성·LG, 자동차 전장부품 승부
올해 정기인사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삼성과 LG다. 특히 삼성은 자동차 전장부품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주력계열사인 삼성전자가 '전장사업팀'을 신설했다. 기존 삼성SDI의 배터리, 삼성전기의 자동차 부품 사업과 연계해 전장부품을 키우겠다는 생각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기술을 기반으로 인포테인먼트, 자율주행 등의 분야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반도체기술을 기반으로 차량용반도체 사업에도 뛰어든다. 전장사업팀장은 과거 삼성자동차 시절 전략업무를 맡았던 박종환 부사장이 맡았다.
삼성이 자동차 전장부품 사업을 시작하면서 이미 이 분야를 육성중인 LG와의 경쟁도 더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LG는 이번 정기인사에서 구본무 회장의 동생인 구본준 부회장을 지주회사 LG로 이동시켜 신성장사업추진단장에 임명했다.
그룹 차원에서 육성중인 자동차부품과 에너지 등 신사업 분야의 성장속도를 높이기 위한 결정이다. 특히 구 부회장은 LG전자 대표이사 시절 VC사업본부를 신설하는 등 자동차 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LG 역시 LG화학이 배터리, LG이노텍이 모터 등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고 있어 앞으로 전장부품 분야에서 삼성과 LG의 경쟁구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삼성의 자동차 전장부품 사업 진출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의중이 반영됐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어 향후 이 분야의 성과가 삼성과 LG 오너일가의 자존심 대결이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 현대차, 고급화 전략·SK, 5대사업 낙점
재계 2위인 현대차그룹은 이미 브랜드 고급화 전략에 시동을 건 상태다. 정의선 부회장 주도로 고성능 브랜드 'N'에 이어 럭셔리 브랜드(제네시스)를 런칭했다. 최근 발표된 에쿠스 후속 EQ900은 사전계약만 1만3000대에 달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현대차는 오는 2020년까지 6종의 제네시스 라인업을 구성할 계획이다. 대형 세단에 이어 중형 세단, 중대형 SUV, 쿠페 등의 차종이 보강된다.
현대차는 제네시스 브랜드 육성을 위해 별도조직도 구성했다. 디자인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인 루크 동커볼케를 영입한 게 대표적. 루크 동커볼케는 푸조를 시작으로 아우디, 람보르기니 등의 디자인을 맡아왔다. 최근에는 벤틀리 수석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동안 수시 인사를 실시해온 현대차그룹은 연말에 국내외 영업력 강화와 브랜드 고급화 전략에 맞춘 정기인사를 단행한다.
SK도 이미 발표한 5대 핵심 성장사업 육성이 진행되고 있다. IT서비스와 ICT융합, 액화천연가스(LNG) 밸류체인, 바이오·제약, 반도체 소재·모듈 등이 대상이다. SK는 지난 상반기 SK와 SK C&C 합병 당시 5대 부문 육성을 통해 매출 200조와 세전이익 10조원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특히 최태원 회장 사면이후 SK의 행보는 더 빨라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OCI머티리얼즈 인수를 통해 반도체 소재 사업을 강화했고, 중국 혼하이그룹내 자회사인 팍스콘과 함께 IT서비스 사업 확대를 추진중이다.
SK텔레콤을 중심으로 한 ICT 융합, 플랫폼 강화 등과 함께 SK이노베이션을 중심으로 한 LNG관련 사업도 진행중이다. 바이오·제약 사업 역시 투자가 이뤄진 상태다. SK는 이들 핵심사업 육성이 이미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번 정기인사에서 최고경영자 라인업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 신사업, 오너가 직접 챙긴다
삼성이나 현대차, SK, LG 외 다른 대기업들도 신사업 육성에 오너 일가가 직접 나서고 있고, 역할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최근 이뤄진 사우디 아람코와 전략적 협력관계 구축 과정에서 정기선 전무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정 전무는 최대주주인 정몽준 전 의원의 아들로 이번 인사에서 1년만에 상무에서 전무로 승진했다. 정 전무는 현대중공업 기획총괄부문장은 영업본부 총괄부문장까지 겸직하며 현대중공업 구조조정과 신사업 육성 등을 책임지게 됐다.
▲ 왼쪽부터 정기선, 김동관, 박서원 전무 |
태양광 사업을 육성중인 한화그룹 역시 김승연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라원 전무가 주도하고 있다. 김 전무 역시 이번 인사에서 1년만에 상무에서 전무로 승진했다. 한화큐셀과 한화솔라원 합병에 이어 효율화 작업 등을 통해 올해 최대 실적을 기록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한화의 설명이다.
면세점 사업에 진출한 두산도 전략 총괄 업무를 박용만 회장의 아들인 박서원 두산 전무 겸 오리콤 부사장에게 맡겼다. 면세점 사업은 두산그룹이 20년만에 유통분야에 재진입한 것이어서 안팎으로 관심이 크다.
재계 관계자는 "신사업의 경우 과감한 투자나 의사결정이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며 "이런 점에서 전문경영인보다 오너일가가 직접 맡는 게 효율적"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