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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주년]①-1 착한기업이 살아남는다

  • 2017.05.22(월) 10:46

사회적책임, 길을 묻다…100년 기업을 위하여
사회와 상생 외면하면 경영위기 봉착
기업들 "이윤에서 행복추구로"..법·제도 정비도 나서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북서쪽으로 230㎞ 떨어진 보그라(Bogra) 지역에 2006년 11월 작고 아담한 요구르트공장이 문을 열었다.

빈민층 소액대출로 유명한 그라민은행과 프랑스의 유제품기업 다농이 손잡고 세운 이 공장은 웬만한 요구르트공장의 10분의 1도 안되는 규모(공장면적 700㎡)지만 단숨에 전세계 시민단체와 기업들의 관심을 끄는 이슈메이커로 부상했다. 세계 최빈국인 방글라데시 국민들의 영양실조와 빈곤 문제를 개선할 '작지만 의미있는 시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회사명은 '그라민 다농 푸드(Grameen Danone Foods)'. 노벨상 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가 다농그룹 회장인 프랑크 리부에게 제안해 설립됐다. 이 공장은 '샥티도이(Shokti Doi)'라는 떠먹는 요구르트를 생산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구르트에 비타민A·철·아연·칼슘 등 필수영양소를 넣어 한컵만 먹어도 하루 권장량의 30%를 섭취할 수 있게 했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당시 방글라데시는 발육정지를 걱정해야할 정도로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이가 전체의 43%에 달했다. 처음 샥티도이 가격은 80그램짜리 하나가 5타카로 우리돈 100원이 안됐다. 방글라데시 전통 방식으로 만든 요구르트보다 40% 가량 저렴한 가격을 책정해 극빈층 어린이들에게 최소한의 영양소를 공급하도록 구상한 것이다.

 


◇ 요구르트가 일으킨 작은변화   

그라민 다농 푸드가 더욱 주목을 끈 건 일자리 문제의 해법까지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그라민 레이디'라는 여성들을 통해 집이나 마을로 샥티도이를 가져가 판매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야쿠르트 아줌마와 비슷하다.

주원료인 우유도 현지 농가로부터 직접 구매해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꾀했다. 이런식으로 그라민 다농이 창출하려는 일자리 목표는 공장 하나당 1600개에 달한다. 지금도 이 회사는 직접고용 300명을 비롯해 400명의 협력 농가, 수백명의 여성 판매원 소득을 올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말 컨설팅그룹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UN의 지속가능 개발목표가 기업에 주는 시사점을 다룬 보고서(Navigating the SDGs)를 냈는데 여기에서 가장 먼저 등장시킨 사례가 그라민 다농 푸드였다. PwC는 "다농은 이 프로젝트로 영양소가 담긴 제품을 저렴한 비용으로 만드는 방법과 빈민층에게 상품을 파는 법, 새로운 시장 진출전략 등을 배웠다"고 평가했다.

◇ 국내기업 "앞만 보고 달렸다" 자성론

국내에서도 기업의 사회적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어느때보다 커지면서 이윤 추구 일변도의 경영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큰 물고기는 큰 물에서 살듯 기업이 속한 사회가 발전해야 기업도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기업 내부에서 싹트고 있기 때문이다.

골목상권 침해논란에 부딪쳐 위기를 맞은 대형마트가 단적인 사례다. IMF 외환위기 때도 매년 수십개씩 점포를 내며 고속성장을 하던 대형마트들은 2010년대 들어 전통시장 몰락의 주범으로 몰려 지금은 출점규제와 영업규제를 동시에 받는 고달픈 처지가 됐다.

그 결과 산업통상자원부가 집계한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등 대형마트 3사의 매출은 2012년부터 5년 연속 역성장했다. 대형마트 한 관계자는 "너무 앞만 보며 달려온 거다. 과거엔 규모를 키우는 게 선(善)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완전히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이마트가 전통시장과 판매품목이 겹치지 않도록 일부 점포에서 신선식품을 빼고 홈플러스가 우수 농산물 산지마을과 협력관계를 확대하는 것도 지역사회와 상생없이는 장기적인 영업기반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이윤'보다 중요해진 '이해관계자 행복'

기업의 핵심가치에서 '이윤'이란 용어를 빼버린 기업도 등장했다. SK㈜와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 SK하이닉스 등 SK그룹 주요 계열사들은 올해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일제히 정관을 바꿨다.

기존에는 "미래성장을 위해 충분한 이윤을 지속적으로 창출해야 한다"고 명시해왔던 것을 "이해관계자간 행복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한다"로 바꿨다. 돈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기업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정관에 못박은 것이다.

SK그룹 관계자는 "사회와 함께 하지않는 발전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경영철학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SK그룹은 지난 2012년 그룹 계열사 등에 사무용품이나 기자재를 공급하는 회사인 MRO코리아(現 행복나래 주식회사)를 사회적기업으로 바꾸는 통큰 실험에 나서 화제를 모았다. "사회적기업이 다양한 사회문제의 해결사가 될 수 있다"는 최태원 회장의 소신이 반영된 결정이다.

현재 행복나래는 사회적기업 194개사의 제품을 사들여 판매하는 등 사회적기업들의 플랫폼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해 4468억원어치를 팔아 53억원(영업이익)을 남겼는데 이렇게 번 돈 대부분(49억원)을 사회적기업 육성을 위한 기부금으로 썼다.  

▲ 지난달 20일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제2회 사회성과인센티브 어워드'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참석자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있다. 사회성과인센티브는 '착한 가치'를 창출한 사회적기업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제도다. 최 회장이 자신의 저서 <새로운 모색, 사회적기업>에서 제안했다.


◇ 사회적책임, 선택 아닌 필수

경영권 분쟁과 검찰수사, 사드 이슈 등 잇단 악재로 몸살을 앓은 롯데그룹도 환골탈태를 꾀하는 중이다. '매출 200조를 달성해 아시아 톱10 기업이 되겠다'는 기존 비전이 성장을 지나치게 강조해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소홀히 했다는 반성에 따른 것이다.

롯데그룹은 일본 롯데홀딩스에서 시작된 폐쇄적 지배구조 등으로 한국기업이냐 일본기업이냐는 정체성 논란에 휘말렸다. 수많은 협력사와 관계에서 갑질을 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정적 여론이 켜켜이 쌓이면서 위기가 한꺼번에 닥쳤다는 게 롯데그룹의 진단이다.

황각규 롯데그룹 경영혁신실장은 지난달 초 그룹 비전 설명회에서 "최근 깊은 성찰을 통해 기업의 목표는 매출성장과 이익확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롯데라는 기업의 사회적책임에 있다는 것을 통감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매출과 이익, 비용 등 정량적 숫자에 가려 그 중요성이 덜 조명받긴 했지만 앞으로 기업의 사회적책임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자리잡고 있다.

 

해외에선 기업이 환경(기후변화), 사회(노동·인권), ·지배구조(경영투명성) 문제를 소홀히 하면 기관투자자들이 투자를 철회하는 등 사회적 책임이 실질적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도는 일정규모 이상의 회사에 직전 3년간 평균 순이익의 2% 이상을 사회적책임 활동에 쓰도록 아예 법률(2013년 회사법 개정)로 규정해놨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은 "기업이 사회적책임을 자연스럽게 이행하도록 하려면 법과 제도 등 인프라 정비가 필수적"이라며 "특히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연기금들이 전면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국가차원에서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은 삼성전자·현대자동차·SK·LG전자 등의 국내 주요기업의 1대 주주나 2대 주주로 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공약하는 등 착한기업으로의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적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리면서 기업들로선 좋든 싫든 변화가 불가피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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