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5월부터 유럽에서 새로운 체외진단기기 규제법이 시행된다. 종전보다 인허가 기준이 엄격해지고 시판 뒤에도 사후 감독을 받아야 하는 등 규제가 강화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유럽 시장에 진출한 국내 진단기기 업체들도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럽은 지난 2017년 5월 새로운 체외진단기기 규제법(IVDR)을 제정했다. 기존 체외진단기기 지침(IVDD)보다 관리 기준을 강화한 것이 특징이다. IVDR은 5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내년 5월 26일부터 시행한다.
기존 IVDD에선 체외진단기기 업체가 자체 인증을 한 후 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반면, IVDR은 체외진단기기의 제품 분류 시스템을 Class A(가장 낮은 위험)에서 Class D(가장 높은 위험)로 나누고, Class A 등급을 제외한 체외진단기기는 정해진 인증기관으로부터 필수로 인증을 받도록 했다. 또 이전보다 엄격한 임상적 증거를 제출해야 한다. 인증기관의 평가 기준도 높아진다.
체외진단기기 업계에선 새로운 규제법 시행 이후 8700개 이상의 체외진단기기가 유럽 시장에서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바이오협회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의료기술산업협회는 유럽 체외진단 시장의 90%를 점유하는 업체 115곳을 대상으로 IVDR 준비상황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업체들은 현재 IVDD 내에서 유통 중인 3만9844개 제품 중 3만1118개의 체외진단기기를 IVDR로 이전등록할 계획이라고 응답했다. 전체의 약 22%에 달하는 체외진단기기는 내년 5월 이후 유럽 시장에서 사라지는 셈이다.
인증이 필요한 체외진단기기에 비해 인증기관이 부족하다는 점은 더욱 문제다. 현행 IVDD 하에선 유럽 내 체외진단기기의 8% 정도만이 인증기관의 인증이 필요하다. 새로운 규제법이 시행되면 필수로 인증을 받아야 하는 체외진단기기가 급증한다. IVDR로 이전등록할 예정인 체외진단기기(3만1118개)의 78%인 2만4346개가 지정 인증기관의 인증을 받아야 한다.
반면, IVDR 인증기관으로 지정받은 업체는 6곳에 불과하다. IVDD의 인증기관 18곳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수치다. 이번 설문조사에 응답한 기업의 53%가 인증기관과 계약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현재까지 별도로 인증을 받지 않아도 되는 Class A 등급 제품 6782개를 제외하고 IVDR 인증을 받은 체외진단기기는 2878개다.
이에 따라 유럽 시장에 진출했거나 진출할 예정인 국내 체외진단기기 업체들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코로나19 진단키트의 경우 '전염성 물질의 존재 및 노출 감지' 등의 분류 기준상 IVDR의 Class D 등급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크다. Class D 등급 진단키트는 인증기관의 인증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국내 진단키트 업체 중에선 씨젠과 에스디바이오센서, 피씨엘 등이 유럽 시장에서 활약하고 있다. 27일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진단키트 수출액은 21억7086만달러(약 2조5551억원)이다. 이 중 유럽 진단키트 시장의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프랑스 △영국의 수출액은 5억4732만달러(약 6444억원)다.
한국바이오협회 측은 "코로나19 진단키트도 등급이 달라져 더 높은 기준의 인증을 받아야 할 수 있다"며 "유럽에 다양한 체외진단기기를 등록한 국내 기업들은 인증을 받을 것과 포기할 것 등을 검토하고 인증기관과 조속한 접촉을 하는 등 유럽의 규제변화에 대한 대응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