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계에서 오랜시간 변하지 않았던 사업영역 중 하나가 정유와 석유화학이었다. 경기흐름에 따라 불황일 때도 있지만 기업입장에선 꾸준한 캐시카우 였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대표적 정유기업 SK이노베이션, 대표적 석유화학기업 LG화학의 행보를 보면 확연하다.
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정유사업의 과잉공급과 시황에 따른 이익차이가 컸던 한계를 깨닫고 배터리 사업 투자로 전환 중이다. 아직 투자가 진행 중이지만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배터리소재 분야에서 SK온·SK아이이테크놀로지를 글로벌 순위로 끌어올렸다.
기존 정유·석유화학·윤활유 사업도 그린사업으로 환골탈태를 진행 중이다. SK종합화학의 경우 국내 최초 석유화학 회사였지만 코로나 첫해 국내 1호 NCC(납사크래킹센터)를 끄고, 사명도 SK지오센트릭으로 바꾸며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을 영위 중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막대한 투자금을 끌어와야 한다는 숙제가 남겨있다. SK온이 대표적이다. SK온은 아직 적자기업이지만 꾸준한 초기 투자를 진행해야 하는 만큼, 연간 3조∼7조원의 역대급 투자를 진행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SK온은 경쟁사에 비해 사업본격화 시점이 늦었지만 비교적 빠르게 글로벌 순위에 안착하고 있다"면서 "늦어지는 기업공개(IPO) 시점을 커버하기 위한 자동차 회사와의 조인트벤처(JV) 투자, 모기업 SK이노베이션의 유상증자, 프리IPO 등을 통한 자금확보가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더불어 SK이노베이션도 최근 1조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결의하고, 신규사업 투자 등을 계획했다. SK이노베이션 측은 수소·암모니아 등 무탄소 에너지 공급을 위한 기술확보와 사업개발, 생활폐기물 가스화, 소형원자로(SMR)에 이미 투자를 진행 중이며 관련분야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부천대장지구에 그린캠퍼스(R&D) 조성을 위한 시설자금 등에도 자금을 사용할 예정이다.
LG화학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LG화학은 LG에너지솔루션 분사 이후 석유화학사업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변화를 꾀하고 있다.
노국래 LG화학 석유화학사업본부장은 최근 임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범용사업 중 경쟁력이 없는 한계사업에 대해 구조조정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라며 사업 구조 재편 및 인력 재배치를 예고했다. 구체적 방안으로는 장기 가동 중지, 사업 철수, 지분 매각, 합작법인 설립 등이 언급됐다.
LG화학이 강도 높은 메시지를 낸 까닭은 공급과잉에 수요부진까지 겹쳐 시황 회복 시기를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LG화학의 석유화학 부문의 타격이 컸다. 해당 부문은 지난해 4분기 영업손실 1660억원을 기록한 데 이어 올해 1분기에도 영업손실 508억원에 그쳤다.
LG화학은 지난해 2월 인베스터데이를 열고 오는 2030년까지 현재 매출의 2배가 넘는 60조원을 달성, 친환경 고부가 신사업 비중을 절반 이상으로 끌어 올린다는 ‘블루오션 시프트 전략’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사업 구조조정 재편은 사실상 가닥이 잡힌 셈이다.
당시 신학철 부회장은 "LG화학이 추구하는 성장 전략은 글로벌 산업 대전환기를 기회 삼아 연구개발과 전략적 투자는 물론 인수합병까지 포함한 내외부의 모든 성장 기회를 모색하여 블루오션을 선점하는 것"이라며 "2030년까지 친환경 비즈니스, 전지 소재, 신약 중심 글로벌 과학 기업으로 비즈니스의 핵심 축을 전환하고 어떤 경영환경 속에서도 흔들림없이 성장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1년 3개월 후엔 목표 매출을 10조원 상향조정하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회사가 설정한 3대 신성장 동력 중 배터리 소재 사업과 신약 사업에 대한 성장 기대감이 예상보다 높아졌기 때문이다.
지난 5월16일 LG화학은 장래사업·경영계획 정정 공시를 통해 2030년 3대 신성장 동력 매출 목표를 기존 30조원에서 40조원으로 올리며 전체 목표 매출을 기존 60조원에서 70조원으로 상향조정했다. 이 가운데 배터리 소재 분야가 21조원에서 30조원으로, 혁신 신약이 1조원에서 2조원으로 각각 조정됐다.
LG화학은 사업 구조조정을 통해 마련된 재원으로 신성장동력 사업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2025년까지 예정된 투자비용은 배터리 소재에 6조원, 친환경 소재에 3조원, 혁신 신약에 1조원 등이다.
이에 LG화학은 다양한 자금조달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일 생명과학부문의 체외진단용 의료기기사업부를 1500억원에 사모펀드에 매각키로 한 것도 선택과 집중을 통한 체질개선 차원이라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진단사업을 주로 하는 해당 사업부를 정리해 마련된 자금으로 글로벌 신약 개발에 방점을 두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LG에너지솔루션 지분을 활용한 자금조달 방안도 논해진다.
LG화학 측은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바 없다”는 입장이지만, 업계는 LG화학이 2% 안팎의 LG에너지솔루션 지분을 활용해 2조원 가량의 자금을 마련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LG화학은 현재 LG에너지솔루션 지분 81.84%를 갖고 있는데, 이중 일부를 매각하거나 교환사채를 발행하는 등의 방법이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