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인더스토리는 매주 토요일, 한 주간 있었던 기업들의 주요 이슈를 깊고, 쉽고, 재미있게 파헤쳐 보는 코너입니다. 인더스트리(산업)에 스토리(이야기)를 입혀 해당 이슈 뒤에 감춰진 이야기들과 기업들의 속내를 살펴봅니다. [편집자]
여전히 넘기 어려운 산
참 쉽지 않습니다. 산을 하나 넘으니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험난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습니다. 기나긴 여정의 끝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합병 이야기입니다.
대한항공은 아시아나 합병을 위해 총 14개국 경쟁당국에 기업결합 심사를 요청했습니다. 그중 11개국 승인을 받았거나 신고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심사를 마친 상황입니다. 남은 곳은 EU, 미국, 일본입니다. 현재 합병은 EU에 막혀있는 상태입니다.
당초 EU집행위원회 승인은 무난해 보였습니다. 대한한공이 EU 역내 노선 일부를 양보하는 선에서 마무리될듯 했습니다. 그런데 EU가 다시 제동을 걸었습니다. EU집행위원회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 승인 여부 결정 시점을 "업무일 기준으로 20일 연장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EU집행위가 심사 기한을 연장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왜 연장했나
이번 심사 기한 연장은 대한항공이 EU집행위의 시정 조치안을 수정하기 위해 요청한 겁니다. 이를 EU집행위가 받아준 겁니다. 다시 말해 대한항공은 최종 답안지를 수정할 시간을 요청했습니다. 대한항공은 답안지를 어떻게 수정해야할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업계 등에 따르면 EU집행위는 대한항공의 아시아나 합병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 5월 EU집행위가 발표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의 기업결합 심사에 대한 심사 보고서가 대표적입니다. 중간결과발표 성격인 이 보고서에서 EU집행위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가 합병할 경우)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 등 4개 노선에서 여객 운송 서비스의 경쟁을 제한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EU집행위가 가장 민감하게 보고 있는 부분이 경쟁 제한입니다. EU집행위는 대한항공이 아시아나를 합병할 경우 유럽 노선에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여타 항공사들이 승객 서비스나 화물 운송에서 경쟁 제한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EU집행위의 시각입니다. 이에 따라 대한항공은 EU집행위의 우려를 해소할 방안을 마련하는 데에 집중해왔습니다.
이미 많이 내놨는데
업계에서는 EU집행위가 합병 승인을 위해 매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한항공도 무척 당황스러워하고 있다는 후문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대한항공 측이 EU집행위에 제시한 협상안 보다 더욱 강화된 조건을 전달한 것으로 안다"며 "대한항공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내놓은 것도 상당한데 더 내놓으라는 것이어서 무척 곤란한 상황이다"고 밝혔습니다.
대한항공은 아시아나 합병을 위해 EU집행위에 여객 분야에서 유럽 공항의 슬롯(특정 시간대 이착륙할 수 있는 권리)과 아시아나를 대체할 항공사를 찾는 작업을 진행해온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대한항공은 이미 영국 히스로공항의 7개 슬롯을 넘겨준 상태입니다. 중국에서도 베이징·상하이·창사 등 노선 일부 슬롯을 반납하는 등 대한항공으로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분석입니다.
하지만 EU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선 더 많은 슬롯을 유럽 기반 항공사에 넘겨야 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EU집행위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합병으로 항공 화물 운송 시장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는 만큼 화물 부문도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게 되면 대한항공 입장에선 수익성이 악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항공의 고민이 큰 이유입니다.
현재 대한항공은 내부적으로 대비책 마련에 고심 중입니다. EU 역내 어떤 슬롯을 얼마나 더 포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후문입니다. 대한항공 입장에선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합병에 100% 걸었다"
대한항공이 아시아나 합병에 사활을 거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히 국내 항공 산업을 재편하고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것을 넘어,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의 경영능력 검증 시험대이기도 합니다. 조 회장은 최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여기에 100%를 걸었고, 무엇을 포기하든 합병을 성사시킬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강력한 합병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만일 합병에 실패한다면 조 회장의 리스크는 커집니다. 무엇보다도 "100%를 걸었다"고 했음에도 결과가 좋지 않다면 조 회장의 리더십에도 흠집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대한항공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커질 겁니다. 조 회장의 리더십이 흔들리면 한진그룹의 경영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세력들이 또다시 달려들 수 있습니다.
산업은행도 좌불안석입니다. 산업은행은 이번 합병의 밑그림을 그린 곳입니다. 게다가 국민의 세금으로 수천억원의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따라서 대한항공이 반드시 아시아나를 합병해야 합니다. 그래야 투입된 자금을 회수할 수 있습니다. 강석훈 산업은행 회장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이 무산되는 경우에 대한 플랜B는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결국 대한항공이 EU집행위의 더욱 강화된 조건을 어느선까지 받아들일지 관건입니다. 물론 합병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2021년 에어캐나다도 에어트랜젯 합병 추진 당시 EU집행위의 슬롯 반납 요구에 경쟁력 저하를 이유로 합병 포기를 선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폭풍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딜레마에 빠진 대한항공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