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배터리 산업이 거대 전환점에 섰다. 전기차(EV)와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의 동반 성장으로 전 세계 배터리 수요는 2023년 처음으로 연간 1테라와트시(TWh)를 돌파했고,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 수치가 2030년까지 세 배 이상 늘어난 3TWh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수요 확대가 곧 한국 기업의 기회를 의미하진 않는다. 국내 업계에선 "과실은 커녕 생존이 위태롭다"는 위기감이 더 짙다. 중국이 저가 배터리를 앞세워 판을 흔드는 가운데 미국은 관세와 보조금을 병행하며 압박을 강화하고, 유럽은 ESG와 실사 규제로 생애주기 전체를 통제하고 있다.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쥔 북미, '지속가능성'을 진입장벽으로 내세운 유럽 사이에서 K-배터리는 생존의 공식을 다시 짜야 한다. 데이터·시스템·협업 역량이 곧 글로벌 경쟁력인 시대. 지금 필요한 건 공급망 재설계와 규제 대응의 선제적 전략이다.
돌아온 트럼프, "당근은 유지됐지만 채찍은 정교해졌다"
지난 25일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본사 아모레홀에서 'K-배터리, 위기에서 찾는 기회' 세미나가 열렸다. 이번 행사는 삼일PwC와 한국배터리산업협회가 공동 주최했으며 북미·유럽 중심의 글로벌 배터리 시장 변화와 이에 대한 국내 기업의 대응 전략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이날 발표자들은 글로벌 규제 환경이 더욱 정교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위기의식을 공유했다. 김승철 삼일PwC경영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글로벌 전기차 시장은 여전히 성장 중이지만 중국을 제외하면 성장률은 5%에 불과하다"며 "한국 배터리 기업이 진출할 수 있는 실질적 시장은 미국과 유럽이며, 단순 물량 증가를 넘어 글로벌 제조업체들의 전략적 변화가 병행되지 않으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북미는 여전히 세계 최대의 EV 보조금 시장이다. 동시에 가장 빠른 속도로 통상·관세 규제가 진화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 이후 미국의 보호무역 기조는 더욱 분명해졌다.
소주현 삼일PwC 파트너는 "관세율이 꾸준히 하락세를 보이다 트럼프 1기 들어 반등하기 시작했다"며 "이후 4년만 버티면 된다는 기대와 달리, 바이든 정부에서도 관세 기조와 대중 압박 기조는 그대로 유지됐다"고 설명했다.
현재 자동차와 철강 등 특정 품목에 대해선 25~50% 수준의 관세가 유지되고 있으며, 국가별 상호관세와 품목별 무역확장법(232조)의 이중 트랙이 병행 적용되고 있다. 배터리도 예외는 아니다. 전기차용 배터리 완제품과 셀, 리튬·니켈 등 핵심 광물, 일부 부품까지도 조사 대상에 포함된 상태다.
특히 자동차에 대한 관세 부과는 전기차 판매 위축으로 직결될 수 있고 이는 배터리 수요 전반에 간접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 산업 생태계 전반에 파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리스크는 작지 않다. 아직 배터리 완제품이나 소재에 대한 관세가 전면 발효되지 않았으나, 트럼프의 통상 전략 흐름을 감안했을 때 향후 적용 가능성이 높다는 게 업계 판단이다.

그럼에도 미국 내 투자 유인은 여전히 존재한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라 한국 기업들은 배터리 생산에 대해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고, 최근 상원에 상정된 '정부예산조정법안(OBBB)' 초안도 이를 2032년까지 그대로 연장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소 파트너는 "당초 하원안에선 '2031년부터 세액공제를 25%로 줄이자'는 내용이 담겼었지만, 상원안은 IRA 규정을 그대로 유지해 100% 공제가 가능하도록 했다"며 "기업 입장에선 불확실성이 다소 해소된 셈"이라고 말했다.
OBBB는 7월에서 8월 사이 의회 통과가 유력시되고 있으며, 현재까지의 논의 흐름상 상원 초안대로 확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문제는 '채찍'이 더욱 정교해졌다는 점이다. OBBB는 중국산 부품과 소재를 제한하는 'MACR(Minimum Applicable Cost Ratio)' 조항을 신설했다. 배터리 생산에 사용되는 핵심 광물과 부품 중 일정 비율 이상을 비(非)중국산으로 조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첫해 기준 60%에서 매년 5%포인트씩 상향돼 2030년부터는 중국산 비중이 15% 이하여야 한다.
여기에 기존 외국우려기업(FEOC) 기준은 '금지외국기관(PFE·Principally Foreign Entities)' 체계로 대체된다. 단순한 지분율을 넘어 실질적 영향력과 기관 간 연계 여부까지 따지는 방식으로 규제는 한층 복잡해졌다.
또 전기차 구매자에게 제공되는 세액공제(보조금) 혜택이 단계적으로 축소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지금까지는 IRA에 따라 제조사와 소비자 모두가 혜택을 누렸지만, 향후 제조 지원은 유지하되 소비자 대상 인센티브는 줄어들 수 있다는 전망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수요 위축 가능성까지 변수로 고려해야 하는 국면이다.
이처럼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압박이 전방위로 확산되는 상황서 단기적 비용 전략과 중장기 공급망 재편을 병행하는 '투트랙 해법'이 요구되고 있다. 소 파트너는 "관세는 굉장히 오래된 세금이고 전략도 이미 정해져 있다"며 "가격 곱하기 세율 구조이기 때문에 세율이 고정돼 있다면 결국 가격을 낮추는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이어 "지금은 관세 절감 아이디어를 단기적으로 활용하되 OBBB·수출통제·세이프가드 등 각종 변수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대응 전략을 설계해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EU '배터리 여권' 시대…"규제 GPS 읽어야 산다"
유럽은 친환경 기준을 넘어 공급망 투명성과 ESG 요건을 산업 운영의 필수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단순한 문서 제출 수준을 넘어 밸류체인 전반에 걸친 데이터 추적과 실사 역량이 요구되는 새로운 규제 국면이 도래한 셈이다.
이보화 삼일PwC 파트너는 "당초 ESG는 기업 차별화를 위한 전략이었지만, 지금은 유럽 수출의 기본 전제 조건이 됐다"며 "EU는 내연기관 금지와 전기차 확대 등 '그린딜 산업전략'을 통해 친환경 전환을 경제 성장의 레버리지로 삼고 있고 배터리는 그 중추"라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EU는 배터리 생산에 필요한 핵심 광물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며 "전략 산업의 지속 가능성과 리스크 관리를 위해 자원 조달 단계부터 추적 가능한 규제 도입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부연했다.

특히 2023년 8월 발효된 'EU 배터리규정(EUBR)'은 배터리의 설계부터 생산·수거·재활용까지 전 생애주기를 포괄하는 강도 높은 규제다. 조항별로 2024년부터 2030년까지 순차 적용되며, 2027년 2월부터는 전기차 및 산업용 배터리에 '디지털 배터리 패스포트(DBP)' 탑재가 의무화된다.
이 파트너는 "DBP는 EU 순환경제 전략의 출발점"이라며 "이미 CATL과 볼보 등 여러 기업이 파일럿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고 이는 곧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아울러 △탄소발자국 공개 의무 △재활용 원료 사용률 규제 △배터리 성능·내구성 기준 등의 조항도 순차적으로 시행된다. 이에 따라 전과정평가 기반의 탄소배출 데이터를 확보하고 내부 데이터베이스 체계를 구축하는 한편, 전사적자원관리(ERP)와 소재·생산 시스템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작업이 기업들의 주요 대응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 공급망 실사 의무(CSDDD)도 핵심 규제로 부상하고 있다. 이 파트너는 "기존에는 간접 공급망까지 실사해야 했지만 최근엔 직접 계약관계로 범위가 완화됐다"며 "실사는 2년 뒤 본격화될 예정이고, EU 배터리 규정 내 관련 조항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ESG는 더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조건이며 데이터 확보·기술 구현·전사 협업이 경쟁력을 좌우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공급망 규제가 한층 정교해지면서 기업들이 더 이상 단순 원산지 관리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과거처럼 1차 협력사 정보만 파악하는 방식으로는 부족하며, 원광물 채굴부터 소재 가공·부품 조립·최종 출하에 이르기까지 밸류체인 전반을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새로운 경쟁력의 기준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최준걸 PwC컨설팅 파트너는 "배터리 패스포트 등 복합 규제에 대응하려면 거래선의 지분 구조·소재 출처·ESG 정보까지 포함된 종합 데이터 체계가 필요하다"며 "구매·제조·재무·IT 전 부서가 통합적으로 움직여야 대응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또 ERP·원산지 관리·탄소 산출 시스템을 하나로 연동하고 이를 외부 포털과 유연하게 연결할 수 있는 시스템 설계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규제는 계속 나오는데 시스템은 한 번 만들면 바꾸기 어렵다"며 "유연한 설계와 사전 대응 역량이 결국 규제 대응의 격차를 만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