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석유화학 산업이 한계의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글로벌 공급 과잉에 중국·중동발 증설 공세까지 겹치며 업황은 장기 침체에 빠졌는데요. 정부가 연말까지 나프타분해시설(NCC) 생산능력을 25% 줄이라는 고강도 목표를 내걸며 사실상 '석화 구조조정'을 공식화했지만, 정작 기업 간 통합 논의는 제자리걸음입니다. 압박만 거세지고 해법은 보이지 않는 사이 업계는 놓쳐선 안 될 '골든타임'을 허비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합쳐야 산다" 공감대에도 실행은 난망
최근 LG화학이 임금피크제 대상 직원을 상대로 희망퇴직 절차를 시작하는 등 일부 자율적 구조조정 움직임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수·대산·울산 등 주요 석화단지에서 진행되는 설비 통합 논의는 이해관계 충돌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데요.
업계 내부에선 정부가 연말까지 구조조정안을 제출하라고 못 박은 데 따른 부담이 큽니다. 표면적으로는 기한에 맞춰 계획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실제 실행 단계에선 얽히고설킨 이해관계가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설비를 멈추거나 매각할 경우 누가 비용을 부담하고 어떤 이익을 가져갈지가 명확히 정리돼야 하고, 정리되는 설비 인력의 재배치 문제까지 겹치면서 협상은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LG화학과 GS칼텍스, 롯데케미칼과 HD현대케미칼 등 다양한 통합 시나리오가 거론되지만 정작 가장 큰 걸림돌은 설비 가치 평가와 비용 분담 문제입니다. 상대적으로 재무 여력이 있는 정유사와 감산 압박이 시급한 석화사 사이의 이해가 엇갈리면서 논의가 지지부진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합쳐야 산다"는 공감대는 형성돼 있지만 누가 어떤 희생을 감수할지를 두고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는 반응이 나옵니다.
현재 10개 주요 석화기업은 연말까지 구체적 구조조정 계획을 제출하기로 정부와 협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공정거래법 완화, 세제·금융 지원 등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기업들이 내놓을 수 있는 '자구안'은 한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는 자율적 구조조정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정책 공백 속 기업들만 압박받는 구도"라는 불만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정부는 "기업들의 자구책을 전제로 금융·세제 지원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금융당국의 태도도 단호합니다.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려 하니 보따리부터 내놓으라는 격"이라고 직격탄을 날렸죠. "돈 잘 벌 땐 외면하다가 이제 와서 정부에 손 벌리는 것은 곤란하다"는 냉랭한 시각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셈입니다.
이 같은 기조에 업계 내 우려는 깊어지고 있습니다. 업계 한 관계자는 "각자 자구책을 내라는 요구만으로는 이해관계가 얽힌 통합을 이끌어내기 어렵다"며 "공정거래법 예외 적용과 세제 감면 같은 제도적 장치가 병행돼야 기업들이 움직일 유인이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정부가 '과거 충분히 돈을 벌지 않았느냐'는 시각이 강해 업계 요구를 선뜻 수용하진 않을 것"이라며 "지금은 기업들이 어떤 대책을 마련해 오는지 보겠다는 태세라 업계도 말을 아끼는 분위기"라고 전했습니다.
전문가 "특별법 없이 해법 없다"
전문가들도 구조조정의 제도적 기반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읍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독과점 규제에 막혀 통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공정거래법을 일부 풀어주려면 특별법 제정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진단했습니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기업결합 심사에서 일정 기준을 넘으면 '경쟁 제한성'을 자동 추정하는 구조를 두고 있습니다. 단일 기업의 점유율이 50%를 넘거나 상위 3개 기업의 점유율 합이 75%를 초과하면 별도의 정밀한 심사 없이도 '경쟁을 해칠 가능성이 크다'고 간주되는 방식입니다. 이 경우 오히려 기업들이 "실제로는 경쟁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점을 역으로 입증해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과제라는 게 그의 설명입니다.
이 교수는 "사실상 이번 구조조정 논의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시작됐어야 했다"며 "중국도 과잉투자 부작용을 스스로 인정하고 노후 설비 감축에 속도를 내고 있는데, 한국은 여전히 이해관계 조율과 제도적 미비에 발이 묶여 대응이 늦어질수록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이달 중 20년 이상 된 노후 NCC 설비를 대상으로 한 감축안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비효율적인 소규모 설비를 우선 정리하는 수준이지만 이미 대규모 신규 증설이 진행되는 가운데 한국만 늑장 대응을 이어간다면 시장 경쟁서 밀릴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석유화학 산업의 체질 개선은 기업의 자구 노력과 정부의 제도적 뒷받침이 함께 맞물려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압박과 지원 사이 간극만 벌어진다면 놓쳐온 골든타임은 끝내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는데요. 국내 석화업계가 다시 도약할지 아니면 뒤처진 채 위기를 반복할지는 정부와 기업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