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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시간이 숨 쉬는 동네 '북촌'

  • 2019.08.23(금) 10:54

[페북사람들] 방보영 프리랜서 다큐감독

KBS 개그콘서트 봉숭아학당에서

'연변총각'으로 인기를 끈 강성범은

이야기를 할 때마다 허풍을 떨면서

연변 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강성범의 개그로 서울 북촌을

소개했다면 아마도 이랬을 것 같다.

"저희 북촌에서 100년 된 집들은

집 축에도 못 낍니다.

한 300년은 되어야 집이구나 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면

옛 모습을 잃어버리기 마련이지만

북촌만은 그때 그 시간에 머물러 있다.

100년을 훌쩍 넘은 많은 건물들이

그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공간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쉿~! 여기선 소곤소곤 대화해주세요."

마을 곳곳 이 문구가 붙어 있을 정도다.

1900년대 초 한 선교사가 남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예전 북촌 일대의

지리적인 특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좌우로 두고

아래로는 율곡로를 경계로 한 지역이다.

예로부터 배신임수의 주거 조건에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도성 내 최고 주거지로 손꼽혔다.

특히 궁궐과 가까워 왕족과 권문세가들

그리고 주요 관청이 일찍이 자리 잡았다.

백악과 응봉에서 내려오는 3개의 능선은

삼청동과 가회동 계동 원서동을 구분하고

그 사이를 흐르는 4개의 물길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한옥 주거지가 만들어졌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별궁과 관아시설은

학교나 관공서 등으로 바뀌었고

대갓집이 있던 대형 필지들은

작게 나눠 개발이 이뤄지면서

현재 북촌의 모습을 갖췄다.

사진자료: 서울역사박물관

1920년대 경성은 도시 집중화 현상으로

인구가 갑자기 크게 늘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택 부족 현상이 심각해졌고

1930년대 대규모 필지 개발과 함께

본격적으로 주택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북촌 또한 이 시기에 큰 변화를 겪는다.

국공유지와 대갓집, 미개간지를 개발해

도시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했다.

"여기서 집을 찾으려면

회나무 위쪽이요? 아래쪽이요?

많이들 그렇게 묻곤 하지.

그걸 지나서 가는지 마는지."

가회동 30번지 이재완가 맹현댁

골목 초입으로 쭉 들어가서

임인식 가옥과 오봉빈 가옥을

지나면 바로 위쪽 골목 어귀에

키 큰 회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이 키 큰 회나무를 지나서

가회동 31번지 골목으로 올라가면

1930년대 부동산업자 정세권이 개발한

도시한옥 주거지를 볼 수 있다.

회나무 주변으로는 아름다운 한옥들이

빼곡히 들어선 골목풍경이 펼쳐진다.

이쪽으로 또 저쪽으로 뻗어있는

가회동의 좁은 골목으로 인해

회나무는 동네 이정표 역할을

오랜 시간 담당해오고 있다.

창덕궁길을 따라 이종열가 가옥

위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다 보면

창덕궁 신선원전 외삼문 담장 아래

원서동 빨래터와 마주치게 된다.

조선시대 훈련도감의 본명인

북영에서 발원한 북영천의

물길이 사시사철 흘렀던 곳이다.

왕가와 민가의 공간을 경계 짓는

궁궐 담장 아래 원서동 빨래터엔

궁중 나인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북영천 맑은 물로 빨래를 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 북영천 복개 이후론

빨래하는 모습은 물론 물길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원서동 빨래터'라는

버스정류장이 있을 만큼

의미 있는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중앙고교는 1908년 기호학교로 설립

융희학교를 흡수하면서 중앙학교가 됐다.

김성수는 1915년 중앙학교 인수 후

이듬해 지금 자리인 계동1번지로 옮겼다.

중앙학교는 일제강점기 당시

3.1운동의 책원지이자

6.10 만세운동의 주도지가 되었다.

계동 교사로 이전한 1917년부터

오늘날까지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자리서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1895년 개교한 재동초등학교 역시

지금까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자리에 있는 북촌 터줏대감이다.

가회동과 계동, 원서동 어린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 학교를 다녔다.

계동길은 율곡로서 중앙고교를 향해

직선으로 곧게 뻗은 골목길이다.

제생원이 있어 제생동, 계생동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계동이 되었다.

해방 전후엔 북촌의 다른 지역과 달리

계동길을 따라 상권들이 많았다.

계산한의원이 처음 자리 잡은

계동 127번지 근처엔 중국집과 목욕탕

이발소 등의 생활시설들이 있었고

중앙고와 휘문고, 대동상고, 재동초교 등

학교가 많아 서점과 교복점, 문방구 등

많은 상점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가회동은 그때 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이 한 집이나 마찬가지였어.

그냥 친한 정도가 아니라

아무 데나 들어가 밥 먹고 그랬지.

한 가족으로 봐야 돼.

어른들도 예전엔 다 교류했지.

김장하는 날은 동네잔치였어.

아버지 같은 경우엔 1년에

몇 십 명씩 손님이 오시곤 했지.

그러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다 와서 같이 음식을 만들었어.

그땐 골목골목 빨빨거리고 다녔는데

가회동 36, 38번지 부근이야."

(자료발췌: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 삼청동 정독도서관 앞

나지막한 언덕을 넘어가면

가회동 북촌 계동 원서동으로 갈 수 있다.

삼청동에서 옛 모습을 찾아보긴 어렵지만

어린시절 골목골목 숨차도록

뛰어다니던 그 추억이 그립다면

어느덧 찾아온 가을과 함께

추억여행을 떠나봐도 좋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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