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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기업 팩트체크]④벳시구리광산과 조선인의 눈물

  • 2019.09.24(화) 13:00

<비즈니스워치 특별기획 전범기업 분석> 스미토모그룹
일제강점기 한국·일본 등 91개 작업장 운영 노무자 강제 동원
재벌해체 후에도 결속력 여전…파나소닉·아사히맥주와도 인연

"일만 시키지. 우리 한국 사람이 죽은 사람이 많이 있다. 가보면 굴 안에 금을 판다고, 즈그 대동아 전쟁 하니까 금을 캐가지고 뭐 만든다카이. 거 가다가 광산이 무너지면 서서히 죽고, 죽어봐야 까짓 개죽음 한가지지."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이하 대일항쟁기위원회)의 전신인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 발간한 훗카이도 강제동원 피해 구술자료집'에는 일본의 3대 재벌인 스미토모(住友)에 의해 강제동원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1923년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여락리에서 출생한 오OO 할아버지는 20살이던 1942년 스미토모가 운영하는 고노마이 광업소(鴻之舞鑛業所)로 강제동원돼 금을 캐는 일을 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금이 군수물자로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고노마이광업소로 강제동원 된 오OO 할아버지를 도치기현 소재 후루카와아시오광업소로 전환 배치해 구리를 파는 일을 시켰다.

할아버지가 한국 땅을 밟은 건 1947년 8월 해방이 되고 2년 뒤의 일이었다. 당시 일본 기업들이 조선인 노무자에게 강제저축을 강요하면서 한국으로 돌아갈 뱃삯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광산업으로 몸집 키운 스미토모

훗카이도 스미토모 광업주식회사 고노마이 광업소로 동원되었을 당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광산노무자 복장의 단체사진 [자료=강제동원 기증자료집:사진류, 명부류, 문서류, 박물류, 기타/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오OO할아버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스미토모는 미쓰비시와 미쓰이, 일본제철에 이어 가장 많은 작업장을 운영하며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기업이었다. 대일항쟁기 위원회의 활동결과보고서에 따르면 한반도와 일본, 사할린 등의 지역에서 스미토모가 운영한 작업장은 91곳에 달한다.

또한 위원회가 발간한 강제동원 피해자명부에는 스미토모탄광, 스미토모광업에서 노무생활을 한 피해자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스미토모는 창업자인 스미토모 마사토모(住友政友)의 이름에서 따왔다. 스미토모 마사토모는 에도시대 승려였다. 부모의 뜻에 따라 승려가 되었지만 이후 승적을 떠나 교토에서 책과 약국을 경영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오늘날 스미토모그룹의 시작이었다.

스미토모는 에도시대인 1690년부터 광산산업에 뛰어들어 구리를 캐며 활동반경을 넓혔다. 당시 스미토모의 광산업은 일본 유일의 민간 광산업이었다. 그 중에서도 벳시(別子)구리광산은 1973년 폐광 직전까지 일본의 근대화에 일조하고 오늘날의 스미토모그룹을 있게 한 곳이다.

하지만 벳시구리광산에서 노무자 생활을 강요당하다가 귀환한 권OO씨(강제동원 피해자 명부)에겐 오로지 벗어나고 싶었던 장소일 뿐이었다. 광산업으로 몸집을 키운 만큼 스미토모메탈마이닝(SUMITOMO METAL MINING CO LTD)은 스미토모그룹의 주요 계열사이기도 하다.

주식회사 스미토모고노마이광산 채광과에서 사용한 출근증[자료=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 상설전시 도록/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스미토모 정신은 해체되지 않았다

연합국최고사령부(GHQ)의 재벌해체 방침에 의해 스미토모그룹도 해체된다. 당시 후루타유키조(古田俊之助) 스미토모 7대 총수는 GHQ와의 협상에서 "스미토모의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고, 다른 누구에게도 없다"고 항변했지만 이듬해 1월 스미토모 본사는 해산한다.

표면적으로 스미토모그룹은 해산했지만 창업자인 스미토모 마사토모가 남긴 스미토모 정신은 그대로 이어졌다.

스미토모그룹홍보위원회 홈페이지에는 "전후 재벌 해체 뒤 스미토모 산하 각 기업들이 독립적으로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스미토모 마사토모가 남긴 스미토모 정신을 준수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결국 GHQ의 재벌해체 방침에 따라 한국처럼 모회사와 자회사, 계열사들이 서로 지분관계에 있으면서 경영권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는 형성하지 못했지만 스미토모 그룹내 기업들의 근원은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처럼 지분관계가 얽혀 있지 않다고 해서 전쟁 전의 스미토모와 전쟁 후의 스미토모가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단정해선 안된다.

스미토모의 연속성을 부정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근거는 1949년 스미토모 계열사 12개사가 만든 하쿠스이카이(백수회, 白水会)의 결성이 있다. 스미토모 그룹 계열사 사장단 회의로 하쿠스이카이 결성을 통해 전후 해체된 계열사들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파나소닉·아사히맥주와 스미토모

스미토모그룹홍보위원회에서 직접 밝히고 있는 스미토모그룹 계열사는 33곳이다. 스미토모화학, 미쓰이스미토모은행, 스미토모메탈마이닝, 스미토모상사, 닛산전기 등이다.

이와 별도로 스미토모와 관련있는 기업에 전자제품 제조업체로 유명한 파나소닉(Panasonic)이 있다.

파나소닉과 스미토모그룹은 오랜 금융거래관계로 이어져 왔다. 1927년 쇼와시대부터 당시 스미토모은행과 금융거래를 체결했고 2012년 파나소닉이 7721억엔의 적자가 났을 때 미쓰이스미토모은행(스미토모은행과 미쓰이은행이 합병)으로부터 6000억엔의 융자를 받기도 했다. 파나소닉은 자사 홈페이지에서 스미토모와의 금융거래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아사히맥주는 스미토모와 직접적인 지분관계가 없고 스미토모 그룹의 하쿠스이카이나 홍보위원회 멤버도 아니다. 그럼에도 스미토모와 연관성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아사히 맥주의 역대 경영진이 스미토모 출신이기 때문이다.

스미토모은행 부행장을 역임했던 무라이 츠토무(村井勉)가 1982년 아사히맥주 사장으로 취임하고 1986년에는 스미토모은행 부행장이었던 히구치 히로타로(樋口廣太郎)가 무라이 츠토무에 이어 사장이 된다. 무라이 츠토무는 이후 아사히 맥주 회장을 거쳐 명예회장까지 역임한다. 이처럼 스미토모계열 출신이 2대 연속 아사히맥주의 경영진을 맡으면서 일본 내에서도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높다고 평가하고 있다.

스미토모는 한국에도 법인을 두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스미토모상사(스미토모주시회사 지분 100%) ▲한국스미토모전공일렉트로닉스(스미토모전기공업 지분 100%) ▲스미토모세이카폴리머스코리아(스미토모세이카 지분 90%) ▲스미토모에스에치아이싸이크로드라이브코리아(스미토모 중공업 지분 100%) ▲스미토모화학아그로서울(스미토모 화학 지분 100%)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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