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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기업 팩트체크]⑨가미카제 비행기 제작…일본車와 질긴 인연

  • 2019.10.01(화) 15:24

<비즈니스워치 특별기획 전범기업 분석> 자동차 업체
도요타, 강제동원 전력…닛산, 만주사변 참가 사업 확장
스바루·이스즈, 모태 기업 육해군 비행기·군용차량 생산

일본의 산업화는 우리나라보다 약 50년 정도 빨랐다. 19세기말 철도·방직 산업이 자리를 잡았고 1930년대는 중공업 부흥기를 맞아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태동했다. 도요타(トヨタ) 닛산(日産) 스바루(スバル) 이스즈(いすゞ) 등 자동차 메이커가 대표적이다.

이들 기업은 불모지에서 자동차 산업을 일궈냈다. 방직기계 작동원리에서 자동차 설계를 구상해냈고 책상 앞에서 비행기 기술을 연구하다 실제 비행기를 구현해 냈다. 하지만 과정은 훌륭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마련한 자금으로 성장했고 노무자 강제동원에도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러·일 전쟁과 중·일 전쟁 등을 일으켜 확보한 배상금은 산업 육성을 위한 자금으로 흘러갔고 기업들은 조선과 일본 등에서 강제노역소를 운영하며 전투기와 군용차 등 전쟁 물자를 대거 생산했다.

당시 경제 상황을 기록한 일본 문헌과 국내 전범기업 명단, 피해자 증언을 중심으로 그들이 남긴 흔적을 되짚어 봤다. 일본의 유명 자동차메이커 중 하나인 혼다는 전쟁 이후 사업을 개시해 전범기업 논란과 거리가 있다.

#도요타 강제동원 전력...대표 전범기업 미쓰이 지원도 받아 

도요타자동차의 모태는 19세기 말 설립된 도요타상회라는 곳이다. 방직기계 사업을 하던 도요타상회는 1907년 사업 확대를 위해 주식회사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이름을 도요타식자동직기(도요타직기)로 바꿨다.

야스오카 시게아키(安岡重明) 도지샤대 교수가 집필한 '미쓰이 재벌(三井財閥)'에 따르면 도요타상회의 주식회사 재편을 권고한 곳이 대표적 전범기업 미쓰이 계열의 미쓰이물산이다.

미쓰이물산은 방직산업 유치를 위해 도요타직기 설립 당시 자본을 출자했다. 도요타직기는 미쓰이의 후원에 힘입어 기업 규모를 확대해 자동차와 제강 부문 등을 만들었다. 자동차와 제강 부문은 1930년대 각각 도요타자동차공업(현 도요타자동차)과 도요타제강(현 아이치제강)으로 독립했다.

도요타 그룹은 도요타산업(구 도요타금융)이 지배구조 정점에서 각 자회사들을 거느리는 형태의 지주회사 체제로 발전해 나갔고, 1930년대 일본의 중화학공업 성장기 닛산 이시하라 등과 함께 신흥 재벌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사업 확대 과정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강제노역으로 충당했다는 오점을 기업 역사에 남기고 있다.

2012년 당시 이명수 자유선진당 의원실이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대일항쟁기 위원회)'로부터 자료를 받아 발표한 299개 전범기업 명단에 따르면 도요타제강은 일본에서 강제노역소를 운영했다.

1935년 당시 도요타직기의 자동차및 제강소 공장 배치도 /사진=도요타자동차 홈페이지

2016년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이하 대일항쟁기위원회)'가 발간한 활동결과보고서를 보면, 태평양전쟁시기인 1943~1945년께 아이치현(愛知県) 도요타자동차공업 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했다는 김○○씨 등의 증언이 나온다.

종합하면 도요타자동차공업과 도요타제강은 강제동원 전력이 확인된 전범기업이며, 이들의 현존기업인 도요타자동차와 아이치제강은 전범행위를 한 기업을 뿌리로 두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도요타자동차가 미쓰이그룹 계열로 분류되기 때문에 전범기업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미쓰이계 여부를 떠나 도요타자동차 자체가 전범기업을 뿌리로 두고 있다.

도요타 그룹 계열사 상당수는 패전 이후 재벌 해체 대상으로 지정됐다. 이 역시 도요타그룹이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방증이다. 연합군사령부(GHQ)는 소수 재벌 기업이 경제력을 과점했기 때문에 전쟁 반대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현재 도요타 그룹 계열사들은 서로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도요타차 2대주주는 그룹 계열사 중 한 곳인 도요타직기(8.28%)다. 재벌 해체 이후 지주사 체제가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는 현황을 감안해 그룹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이라는 설명이다.

#닛산, 강제동원 증언 다수...만주사변 참가

대일항쟁기위원회 활동결과보고서에는 '닛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업소에서 강제노동이 이뤄졌다는 증언이 20개나 등장한다. 지금의 닛산이라면 닛산차를 떠올리기 쉽지만 과거 닛산은 산하에 광업·임업·어업·화학·기계 등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 지주 기업이었다.

당시 사명은 닛산콘체른(Konzern). 콘체른은 지주회사 체계를 가리키는 독일어다. 강제노동은 당시 주력 계열사였던 닛산광업(현 닛산화학공업)의 야다케(矢岳)·야마다(山田) 탄광 등에서 주로 이뤄졌다.

닛산이 자동차 제조 사업에 진출한 것은 1930년대 들어서다. 토바타주물(戸畑鋳物)과 합작해 자동차 제조 법인을 세우고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토바타주물은 일본 최초 자동차를 제조한 다트(DAT)자동차 내 소형차 부문을 흡수 합병한 곳이다.

만주중공업 1939년 당시 이사회 멤버. 가운데 검정색 정장을 입고 옆으로 눈길을 주고 있는 사람이 닛산 재벌의 창시자인 아이카와 요시스케(鮎川義介)다. /사진=위키피디아

닛산차는 일본군의 만주침략에도 참여했다. 1932년 만주국이 세워진 이후 닛산차를 비롯한 닛산 계열사들은 '만주중공업'이라는 이름으로 만주내 철도 등 각종 인프라를 구축했다. 일본군의 중국 본토 침입의 앞길을 닦은 셈이다.

닛산 재벌은 전시 경제 수혜를 받아 사업 규모를 확대했지만 패전과 함께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주요 재벌 기업들과 함께 해체됐다.

#가미카제 만들던 나카지마비행기…스바루의 전신

스바루의 모체는 1931년 설립된 나카지마(中島)비행기다.

나카지마비행기는 나카지마 일가가 운영하던 비행기연구소가 독립해 탄생했다. 나카지마 재벌은 근대 일본 재계를 주무르던 대표 재벌 기업 중 한 곳으로 꼽힌다. 1940년대 전투기 제조 사업을 통해 급격하게 성장했다.

1951년 일본 지주회사해체위원회가 내놓은 '일본재벌과 그 해체'에 따르면 1938년 552만엔이었던 나카지마비행기의 자산가치는 1945년 2억9128만엔으로 무려 90배 가까이 높아졌다. 태평양전쟁 패전 당시 거느리던 자회사만 29곳에 달했다.

생산량도 상당했다. 나카지마비행기가 생산한 전투기 수는 1941년 3993대에서 1944년 1만1650대로 4배가량 증가했다. 자폭 비행기로 악명 높았던 '가미카제'도 있다. 나카지마비행기의 도쿄 무사시(武蔵) 공장은 1945년 도쿄대공습 당시 최우선 타격 목표로 설정돼 수차례 폭격을 맞아 초토화됐다.

1945년 도쿄대공습 당시 미군 폭격을 받은 나카지마비행기 도쿄공장. /사진=일본국립국회도서관헌정자료실 재인용

나카지마비행기는 전범기업이다. 이명수 의원실이 대일항쟁기 위원회로부터 자료를 받아 발표한 전범기업 명단에 따르면 나카지마비행기가 일본에서 운영하던 강제노역 작업장은 6곳에 달한다.

나카지마비행기는 태평양전쟁 전후 후지공업 우토미야차량 등을 합병해 후지중공업이 됐다. 최근까지도 후지중공업으로 이어져오다가 스바루라는 사명을 사용한 건 2년 전이다. 그 전에는 후지중공업이 '스바루'라는 브랜드를 운영한 것이었다.

스바루는 올 3월 말 기준 자회사 수는 93개, 관계회사 수는 7개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도요타와도 연결돼 있다. 최대주주가 지분 16.82%를 갖고 있는 도요타차다. 지난 29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도요타차는 첨단기술 개발을 위해 스바루의 지분을 20%까지 올리기로 결정했다.

#이스즈車 전신, 도쿄자동차공업·디젤자동차 전범기업

트럭과 버스 등 대형 차량 생산에 주력하는 이스즈자동차는 일본 산업 태동 시기 3개의 회사가 합쳐져 만들어진 기업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3곳 중 2곳이 강제동원 기업명단에 등장한다. 정황을 살피려면 시곗바늘을 1910년 말로 되돌려야 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일본 군부는 자동차 산업 육성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고 전한다. 당시 일본에서 대형차 생산을 기획하던 곳은 이시가와지마(石川島)조선소가 세운 자동차제작소와 도쿄가스공업 자동차사업부, 다트(DAT)자동차 등 세 기업이 대표적이었다.

당시 군부는 대형차의 원활한 생산을 위해 이들 세 기업의 합병을 촉진한다. 그렇게 탄생한 기업이 도쿄자동차공업이라는 곳이다. 도쿄자동차공업은 대형차 생산 경험을 살려 군용 트럭을 생산해 군부대에 납품했고, 특히 이 과정에서 한반도에 강제노역소를 운영했다.

1941년 도쿄자동차공업은 디젤자동차로 사명을 바꿨다. 디젤자동차는 일본에서 강제노역소 두 곳을 운영한 것으로 나타난다. 대일항쟁기위원회 보고서를 보면 가나가와현 디젤자동차 공장에서 강제노역했다는 박○○ 씨의 증언이 등장한다.

디젤자동차는 1949년 이스즈자동차로 사명을 변경했다. 이후 스바루(구 후지중공업), 미쓰비시공업, 닛산차 등과 제휴 관계를 맺고 사업을 꾸준히 확대해 왔다.

현재 이스즈의 최대주주는 지분 8.62%를 갖고 있는 미쓰비시상사다. 이토추자동차투자합동회사가 2대주주로 지분율은 7.17%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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