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6월과 12월이 되면 국세청 명예퇴직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명퇴한 세무서장들 중 상당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당 관내에 세무사 사무실을 개업한다.
어제는 서슬퍼런 국세공무원으로 지하경제 양성화와 세수 확보의 파수꾼이었지만, 오늘은 친근한 세무대리인으로 납세자의 골치 아픈 세금문제에 앞장서는 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납세자에게 도움을 주는 '제2의 인생'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한편에선 공직 생활에서 쌓은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국세청에 부적절한 로비를 벌이는 폐단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기도 한다.
이르면 내년부터 세무서장이 퇴임 직후 관내에서 세무사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최근 국회에선 퇴직 세무공무원들의 '전관예우' 관행을 끊기 위한 세무사법 개정안의 심사가 시작되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 어제는 세무서장, 오늘은 세무사
국세청 명예퇴직자가 관내에 세무사 사무실을 개업하는 일은 오랜 관행이다. 명예 퇴직하는 세무공무원들은 대부분 세무사 자격증을 갖고 나온다. 2000년 12월 이전에 임용된 세무공무원들은 국세행정 경력 10년 이상이고, 5급 이상 공무원으로 5년 이상 재직하면 자동으로 세무사 자격증을 주고 있다.
이들이 퇴직 후 최종 근무지에 사무실을 내면 다른 세무사들에 비해 일을 따내거나 처리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세무서를 향한 민원도 불과 얼마 전까지 지시를 내리던 직원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한층 부드럽게 대화가 통할 수 있다.
세무사 자격증을 보유하면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승인 없이도 자유롭게 법무법인이나 회계법인, 세무법인 등에 취업할 수도 있다. 국가에서 자동으로 세무사 자격증도 주고 취업의 제한도 받지 않도록 제2의 인생을 열어주는 셈이다.
민주당 최재성 의원에 따르면 2010년 이후 국세청 4급 이상 명예퇴직자 159명 가운데 115명이 세무·회계사무소를 개업하거나 취업했다. 이 가운데 70명(61%)은 자신이 최종 근무지 인근에서 세무대리 업무를 시작했다.
지난 6월 국세청에서 명예 퇴임한 안옥자 강남세무서장, 김시재 서초세무서장, 전희재 서대문세무서장, 정달성 용인세무서장, 김관동 충주세무서장, 이주한 서광주세무서장, 유영필 순천세무서장 등도 모두 관할구역 내에 세무사 사무실을 냈다.
◇ "퇴직 후 1년간 수임하지마"
4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따르면 새누리당 서병수 의원이 제출한 세무사법 개정안이 지난 달 26일 조세소위원회에 배정돼 본격적인 입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법안은 세무공무원이 퇴직 전 1년간 근무한 세무관서에서 처리하는 사건에 대해 퇴직 후 1년간 수임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개인 세무사로 활동할 뿐만 아니라, 세무법인의 담당 세무사로 지정되는 경우에도 해당 관내의 세무대리 자체가 금지된다.
퇴직한 세무공무원들이 국세청을 상대로 로비하는 관행은 끊임없이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지난 2월 경찰은 세무조사 대상 기업들로부터 조직적으로 금품을 받은 서울지방국세청 전현직 세무공무원 9명을 적발했다.
이 과정에서 세무공무원 출신 세무사가 대상업체의 조사대행 세무사로 선임돼 고문료 형식으로 돈을 받고 이 중 일부를 세무공무원들에게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5월에는 국세청 출신 세무사가 유명 사교육업체로부터 금품을 받아 서울지방국세청 고위직에게 전달한 사실이 발각되기도 했다.
현재 법관이나 검사 출신 변호사들도 전관예우 방지 규정에 따라 퇴직전 근무지 관련 사건 수임이 1년간 금지되고 있는데, 이와 형평성을 맞추겠다는 취지도 있다. 서 의원은 "국세청 출신 세무사들은 여전히 국세청 직원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어 사회적 견제가 필요하다"며 "국세공무원의 비위와 부정은 국민적 조세저항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엄격히 제약해야 한다"고 밝혔다.